장기 이식을 결정하고 나면 곧바로 기증하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 일부를 떼어내는 일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식을 해도 별 효용이 없는 사람에게 이식을 한다며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기라도 하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저하게 검사를 받아야 한다.

신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과까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나는 아들보다 먼저 일주일여 동안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이식이 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전에 복부 컴퓨터 단층 촬영(CT)을 했었는데

간에 암의 가능성이 보인다며 정확하게 확인하려면 자기공명 단층 촬영(MRI)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병원에 가면 제일 힘든 일 중 하나가 검사받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니 한숨부터 나왔다.

더구나 암이 발생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암세포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의사의 지시대로 MRI를 찍었다.

검사 결과 1센티미터가 좀 안 되는 암이 3개 정도 확인되었다.

검사 결과를 이야기하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걱정되었던지

‘그리 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해주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을 전했다.

암이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으면 수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암이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으면 이식을 해도 곧바로 이식한 간에 암이 퍼지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다른 장기에 전이됐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검사를 두 가지 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들게 산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 수 없이 이틀에 걸쳐 하루에 한 가지씩 또 검사를 했다.

뼈 전이를 확인하는 BONE SCAN 검사와 양전자 방사 단층 촬영법인 PET 검사였다.

검사를 하고 이틀 동안 결과를 기다리는데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암이 초기였기 때문에 전이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에 따라서는 이식 자체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지라 결과가 자못 궁금했다.

아니, 궁금함을 넘어 초조했다.

어디에서 출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초조함이 심장을 짓눌렀다.

몸은 침상에 누웠지만 마음은 뒤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초조함과 싸우다 지친 나는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연스레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기다리다가 ‘기다림’을 생각한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 이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다림은 단지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기다림은 더 이상 손 쓸 수 없어서 내려놓는 맡김이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전능하신 보호자께 위탁하고 두 손을 내려놓는 것이다.

하여, 기다림은 한없이 무정하다.

 

그러나 동시에 기다림은 기대하며 희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이상 손쓸 수 없어 기다리지만 아름다운 내일을 희망하고 꿈꾸며 오늘을 품어내는 것이 기다림이다.

그래서 기다림 속에는 설렘이 동반한다.

입학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의 마음, 씨를 뿌린 농부의 마음,

제대 날을 기다리는 군인의 마음속에는 동일하게 무한한 설렘이 있다.

이들뿐 아니다. 모든 사람은 내일을 희망하며 산다.

한 번 생각해보라. 기다림이 없는 삶을.

얼마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겠는가.

무릇 기다림이 있기에 설렘이 있는 법이다.

기다림이 있기에 여백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법이다.

 

또한 기다림은 묵혀 둠이다.

삶의 모든 것은 오랜 시간 묵혀 두어야 숙성이 되어 제 맛이 난다.

사람도 오래 묵혀 두어야 인격이 성숙하고,

글도 오랜 시간 묵혀 두어야 글맛이 우러나고,

생각도 오랜 시간 묵혀 두어야 깊어진다.

 

믿음도 역시 기다림이다.

약속을 신뢰할 때 기다림이 가능하고, 약속을 신뢰하는 기다림이 곧 믿음이다.

그분께서 약속한 것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렇다. 삶이란 건 온통 기다림이다.

한 생명의 탄생부터가 그렇다.

엄마의 긴긴 기다림이 없이 어떻게 생명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또 태어난 생명이 홀로 서기까지는 얼마나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이 요구되는가?

부모가 되어 보니 알겠더라.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기다림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사람이 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없다는 것을.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친구 간에, 정부와 국민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기다려줌이 없이 관계의 살이 오를 수는 없다.

모든 생명, 모든 관계는 한결같이 기다림을 먹고 자란다.

쌀 알 한 톨, 콩나물 하나, 고추 하나, 과일 하나, 장미 한 송이, 지구의 허파인 산의 나무들,

어느 것 하나 기다림이 없이 된 것이 없다.

모든 게 다 기다림의 열매다.

삶이란 온통 기다림이요 기다림의 연속이다.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기다림’을 생각해보니

‘기다림’은 초조함이기보다는 맡김이요 희망하는 것이었다.

기다려 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부모 되는 최고의 자격 조건이고, 참 인격자가 갖춰야할 필수 항목이었다.

‘기다림’이야말로 위대한 창조의 산실이었다.

놀라웠다. ‘기다림’이 삶의 필수 요소이고 위대한 창조의 에너지라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초조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의연하게 맡길 수 있었다.

이틀 후 결과가 나왔다. 암이 전이되지 않았단다.

고맙고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