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뭐하지만 아내 이야기 좀 해야겠다.

아내는 평상시 긴장하거나 불안해하는 일이 거의 없다.

벌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무서워 어찌할 줄을 모르지만 어지간한 일로는 호들갑을 떨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아내의 영혼 깊은 곳에는 항상 어떤 평안이 숨 쉬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내를 만난 사람들은 ‘얼굴이 매우 평온해 보인다’고 한 마디씩 한다.

사실이다. 아내에게는 큰일이란 게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그것 자체로 그리 대단할 게 없다는 것이 아내의 기본 태도다.

남편의 건강에 대해서도 항상 염려하면서 끔찍하게 챙기지만 불안해하거나 전전긍긍하지는 않는다.

하여, 나는 아내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 수술을 앞두고는 달랐다. 아내가 제일 많이 걱정됐다.

하나밖에 없는 남편과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수술실에 들여보내 놓고 밖에서 노심초사할 아내가 심히 걱정됐다.

수술하는 아들과 나보다도 수술하는 내내 긴장하고 있을 아내가 더 마음에 걸렸다.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아내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수술이 끝난 다음 날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수술하는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무섭고 떨리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아내는 그 날의 일들을 말해주면서 수술하는 내내 긴장하거나 염려할 틈이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아내의 메모 노트에 그 날의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맨 끝에 이렇게 쓰여 있다.

 “새벽 6시부터 기도로 시작된 하루가 많은 이들의 든든한 협조적인 동행으로 염려할 틈이 없었도다(밤 9시30분까지). 혈육의 사랑보다 더 진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사랑을 받음.”

 

그랬다. 우리 가족은 혈육의 사랑보다 더 진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길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와 향상교회 세겹줄기도회(새벽)에서의 중보기도,

새벽 6시부터 향상교회 배상식 목사님과 권순조 전도사님, 유영화 사모님, 김재천 집사님, 이순희 권사님, 김용은 목사님 내외, 그리고 큰 형님 내외분이 달려와 기도해 주었다.

한길교회 김형수 목사님과 김연희 집사님의 1일 금식 기도, 배영진 목사님을 비롯한 동기 목사님들의 12시간 릴레이식 중보기도, 정주채 목사님 내외분의 방문 기도, 보현 형제 등 많은 분들의 격려 방문이 이어졌다.

세계 각지의 다비안들, 선후배 목사님들을 비롯해 주변의 신앙 동지들이 기도해주었다.

아내가 힘들까봐 하루 종일 옆에서 동행해준 3명의 여인이 있었다.

거기다 마침 총회 목회자수련회 기간이어서 총회 목사님들이 합심하여 중보기도를 했다.

정말 생각지 못한 위로와 격려였다.

 

중환자실에서 아내에게 그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총동원해 우리 가족을 지지하고 격려해주고 계시다는 생각,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가족을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친히 당신의 백성들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생각지 못한 생각이 스쳤다. 거기다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하나님을 대신해 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모른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생각이 나에게 찾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존재와 생각 사이의 신비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존재와 생각 사이의 경계선을 긋는다는 게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사람의 몸짓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몸짓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찼다. 뜨거웠다.

아니다. 사실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언어를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아버지의 사랑에 온 존재가 샤워를 하는 듯했다고나 할까.

미천한 나를 살려보겠다고 덤비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긴 듯 했다고나 할까.

노자가 일찍이 도(道)를 말하면서 서두에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도는 본래의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고,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이 이름 본래의 실체가 아니다”(名可名非常名라)고 말한 것도 언어라는 게 진실의 세계를 담기에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인간적인 하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처럼 어려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부활의 세계를 언어의 그릇으로 담아내는 작업은 얼마나 어려웠을지, 얼마나 어려울지가 이해된다.

암튼,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울었다. 나이 50을 넘긴 중년의 사내가 주책없이 울었다.

중환자실에서 지낸 8일 내내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해도,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물론 고통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너무 많다.

가스가 나오고 최초의 변을 배출하는 것만 해도 26시간 동안의 긴 투쟁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체들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중환자실을 빠져 나온 건 수술 후 9일 만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준중환자실로 옮겼는데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비로소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밥 먹는 것 외에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을 빠져 나온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마음도 한결 여유로웠다.

그리고 2-3일이 지났을까. 뜻밖의 사태가 터졌다.

내 악함과 죄악의 실체들이 떠오르는데, 마치 영화 속에서 말들이 힘차게 질주해오듯이 내 죄악상들이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미 고백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달랐다. 같은 죄 인식이었지만 인지의 농도와 깊이가 달랐다. 머리로 안 것을 가슴으로 알았다고나 할까.

죄악 투성이인 내 존재와 삶이 그처럼 형편없고 뻔뻔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라 하기에는 너무 무정했다.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한 삶의 자취들이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내가 수행해왔던 목회조차도 죄악 덩이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수행한 목회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다고 생각했다.

말씀에 비추어 욕망을 절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한국교회의 반성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나름 개혁적인 목소리를 낸 것이 실은 그걸 통해 내 이름을 나타내려는,

나는 다르다는 것을 내보이려는 또 다른 욕망의 작태였음이 보였다. 물론 정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짜 복음의 실체를 까발려 거짓 복음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진정한 복음의 영광과 자유를 맛보도록 성도들을 해방시켜야겠다는 진정성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성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정직을 통해 나를 홍보하고, 내가 말하는 복음이 더 정직한 복음이요 진정한 복음에 가깝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속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짓으로 포장된 하나님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팔아서 뭔가를 얻어 보겠다는 심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랬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과 복음을 파는 자였다.

날이면 날마다 그분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파는 자였다.

예수를 팔아먹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던 그들뿐 아니라 나도 장사치이기는 매양 한가지였다.

구제받을 수 없는 역도였다. 발로 걷어 차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놈이었다.

도저히 그 분 앞에 내 존재를 내놓을 수 없는 허접한 물건이었다.

충격이었다. 나라는 물건을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내 존재가 그처럼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비참함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뺨이 데이는 줄 알고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놀라운 진실 하나를 발견했다.

주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이 나를 회심에 이르게 한 근원이었다는 진실, 사랑과 회심 사이에는 깊은 연결 고리가 있다는 진실을 말이다. 그랬다. 곱씹어보면 곱씹어볼수록 사랑만이 사람을 회심케 하는 유일한 길임이 분명해보였다.

우리 부부가 아들을 키우면서 끊임없이 확인했던 것도 바로 그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고, 또 그래야만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 사람을 회심케 하는 능력의 근원이라는 것을.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라는 하나님께서도 사랑 외에는 인간을 변화시킬만한 길을 찾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걸 보라.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것만이 사랑이기 때문이고, 또 사랑 외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길이요 가장 효과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하여,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도 사랑의 마지막 행위로서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행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