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수술 다음 날부터 수술 부위에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장(腸)이 열리는 과정에서 상상하지 못한 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죽음 같은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아들의 상황을 아내가 간단하게 메모한 것을 토대로 추려 옮긴다(괄호 안은 내가 설명을 덧붙임).

 

 

수술 다음 날인 13일, 허리 통증으로 진통제 세 차례 투여. 저녁 때 상처 부위 피남. 혈장 4개 수혈, 알부민 투여.

14일, 아침 7시 20분에 주치의가 상처 소독하는데 수술 부위를 처음 보고 칼로 가른 상처가 너무 깊고 넓어 눈물이 가슴에서 펑펑 쏟아짐(명치끝에서 아래로 7센티미터, 그 좌우로 정확하게 30센티미터를 갈랐다).

15일, 통증 계속 됨. 상처에서 두 번째 출혈. 저녁 늦게 진통제 투여하여 잠을 청함.

16일, 아침 6시30분 진통제 요청. 저녁 먹고 나서 복부 불편감 시작. 매슥거리고 토할 것 같아 견디기 힘든데 어지럼증까지 있어서 너무 괴로워함. 가스와 함께 복부 팽만감과 변이 나올 것 같아 화장실 4-5차례 드나들고 가스와 물 조금 배설. 몸 상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가슴팍에서부터 잠시 숨 죽여 소리 내어 눈물을 흘림. 얼마나 아팠으면… 나도 같이 흐느껴 울다 기도 후 잠들었지만 밤새 불편하여 잠이 깸. 새벽 5시쯤 다시 매슥거려 화장실 가서 토함. 피가 섞여 나와 다운이 많이 놀람. 간호사는 위장관 코 삽입으로 상처입은 것 같다며 경미하니 안심하라고 달램(아들은 코에 고무관을 삽입한 것을 가장 힘들어 함). 토한 후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서 복도 두 바퀴 돌고 옴.

17일, 새벽부터 매스꺼움, 구토, 어지럼증이 계속 됨. 설사 3번. 장(腸) 활동의 회복을 위해 휠체어(어지러워 도저히 걸을 수 없음)로 병원 복도 두 바퀴 돌고 옴. 복부 사진 촬영 시 또 설사. 복부 이상 없음 확인. 중환자실 면회 후 다시 한 번 설사. 밤 12시 걸음을 연습하는 보조 기구에 몸을 구푸려 싣고 걷기 시도. 휴게실에 탁자, 소파 의자를 모아 침상 마련 후 이불 갖다가 새벽 5시까지 누워서 지냄. 깊은 밤 아무도 없는 병원 복도에서 걷기를 시도하다가 복도 바닥에 엎드려 눕다가 다시 추슬러 일어나 걷기를 반복. 밤 12시, 3시, 6시 간격으로 구토와 설사를 함. 수액 주사. 수액 주사 후 계속 속이 좋지 않은 가운데 기도. 일어나라! 아들아! 일어나라! 아들아! 주님 힘주신다! 주님 고치셨다! 아멘!! 놀라우신 주님! 언제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18일, 새벽 6시 30분경 복부 CT 촬영. 어제보다 가스 찬 곳이 더 많아 보임. 심하지는 않지만 장 유착 증세일 가능성이 큼. 긴급 기도 부탁. 구토로 위와 식도 사이 점막 파열 우려 있어 위장관 다시 삽입 결정. 30분이 채 안 되어 콧줄 빼라고 간호사 부르면서 힘들다고 신음 함. ‘아빠도 콧줄 끼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마음 가라앉히고 적응하려 자세를 시도함. 저녁에 위장관 삽입한 채 힘든 가운데 운동을 시도함.

19일, 새벽 5시 40분경 또 다시 복부 사진 찍음. 6시쯤 스스로 맑은 방귀 뀜 - 할렐루야! 기뻐 다운이 앞에서 만세를 부름. 17일과 18일 밤을 병실과 복도를 오가며 꼬박 날을 샘. 다운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냄. 온화하고 평온하게 묵묵히 참아냄, 견딜 수 없어 웩웩거리면서도 산책 시도(장 활동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걷기를 해야 한다는 말에). 의지를 곧게 세우고 묵묵히 견뎌내는 모습이 눈물겨움. 한 번의 원망이나 불평이 없음. 10시 정도부터 위에서 올라오는 분비물 배출이 없음. 아랫배 편안해 짐. 확실히 장이 열렸음을 확신하고 떼쓰듯 콧줄 제거 요청. 조재원 선생님께서 콧줄 제거하라 명함. 해방됨. 콧줄 빼고 복부 상처 벌어진 부분을 꿰매고 와서 침대에 앉자마자 내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 흐느껴 울기 시작. 얼마나 힘들었는지 복받쳐 울었다. 나도 울고. 다운 운동 가자 한다. 마지막 방귀 한 방을 완벽하게 표출하고 싶다 한다. 걷다가 내 손을 잡고 “우리 기도하자” 한다. 복받치는 눈물과 함께 다운이와 나는 곁사람들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간절히 기도. 복도를 걸으며 가슴 벅찬 아픔과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는 다운이!

20일, 새벽 1시쯤 다시 매스꺼움 증세 시작되어 밖으로 나가 필사적으로 운동 시작(장 유착이 오지 않도록 아들은 눈물겹게 걷기 운동을 함). 수십 바퀴를 걷고 누워서 다리 털기 운동을 하여 새벽이 밝아올 때쯤 2차례 방귀 뀜. 새벽 6시쯤 팽만감이 느껴지던 복부가 가라앉음. 그러나 다시 매슥거려 주치의 달려와 청진함. 복부를 누르니 오른쪽 부분이 가장 아픔. 또다시 CT 촬영 결과 이상 없다 함. 11일부터 오늘 20일까지 금식 상태 계속(2일 물, 1끼 죽 외). 밤새 끙끙 앓으면서 심호흡을 함.

21일. 새벽 6시쯤 작은 고체 7덩이 변을 눔. 물 먹기 시작. 밤 12시 20분경 복부 사진 촬영.

22일 미음으로 첫 식사를 힘들게 먹음(수술 후 꼭 10일 만에 첫 식사를 함). 시원한 변을 모처럼 봄. 장 유착은 없다고 안심.

23일, 오후 2시경 토함. 얼음 계속 물고 뱉기를 반복. 또 복부 사진. 결과 이상 없음. 위 속쓰림으로 무척 괴로워 함. 얼음 물고 뱉기를 한참을 하다가 점심도 먹지 못한 채 침대에 엎드려 잠을 잠. 한 잠 자고 난 후 속 쓰림 증세 사라짐. 기력 점차 회복.

24일, 새벽 1시30분 1차례 토함. 밤새 운동하다가 새벽 7시 잠시 침상에 엎드려 눈 붙임. 운동하다가 지쳐 간호사실 앞에 앉아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 성자의 모습을 보다. 머리 감고 수염 다듬고 야외에 나가 바람 쐬고 들어옴.

25일, 밤새 잘 잠. 새벽녘에 깨었는데 아무 이상 없어서 참 좋았다고 함. 정말 오랜만에 평강 가운데서 밤을 지냄. 감사! 감사! 감사! “이제 살아났다”는 다운이의 고백.

 

 

암튼, 아들은 그렇게 힘든 투쟁을 계속하다가 31일, 그러니까 수술 후 꼭 20일 만에 퇴원을 했다. 보통 10일 정도면 퇴원을 하는 데 아들은 20일 동안 거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한 채 죽음 같은 고통과 싸움을 하다가 퇴원을 했다.

 

사실 이 기록으로는 아들이 겪은 고통의 실상을 전할 수 없다. 옆에서 그때그때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도 아들이 겪은 고통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데, 아내가 아들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어 내 면회를 오지 못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던 걸 통해 짐작만 할 뿐이지 실상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데 글 몇 줄로 어떻게 전할 수 있겠는가? 오직 온 몸으로 겪어낸 아들과 옆에서 지켜 본 아내 외에는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당한 고통의 조각들을 이렇게 모아다가 늘어놓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건 그걸 통해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들의 이런 고통은 정말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진을 계속 찍어보아도 복부에 이상이 없다는데 아들은 계속 토하고, 신물이 올라오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아내도 점차 긴장하기 시작했고,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아들에게 큰 일이 닥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과 긴장,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 부부에게는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신뢰 - 하나님께서 아들을 만지고 계시다는 깊은 신뢰가 가슴 저 밑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의 끝자락까지 밀고 가실 것이다. 하지만 그 끝에는 평안의 항구를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아내도 동의했다. 물론 순간순간 두렵고 불안했다. 안절부절 하기도 했다.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의 파도가 우리를 휩쓸지는 못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 대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아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상상하지 못한 고통을 겪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신뢰가 우리 부부에게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들 다운이를 만지고 계시며, 다운이의 사랑과 헌신을 열납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평탄하고 좋은 것을 통해서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고 험난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통해서도 사랑과 은총을 내미시는 분이다, 평탄하고 복된 것보다는 오히려 험난하고 고된 것 속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영적 지각이 있었다. 하여, 우리 부부는 두렵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과 불안의 포로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반대도 진실이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도 순간순간 불안하고 두려웠다. 정녕 회복될 것이라 믿었지만 의혹의 구름이 없지 않았다. 그랬다. 신뢰와 불안, 평강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그리고 신뢰와 불안, 평강과 두려움이 따로 국밥으로가 아니라 함께 뒤섞여 있는 비빔밥으로 존재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신앙의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신앙 없음’의 증표가 아니라 ‘신앙 있음’의 증표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아들이 겪어내고 있는 고통 속에서 사랑의 맨 얼굴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똑똑하게, 아주 실체적으로 말이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관념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라는 것, 사랑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라는 것,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 사랑은 마음이나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 아들이 자기 몸을 내어놓은 것으로 부족해 온 몸으로 고통을 감수한 바로 저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랬다. 아들은 사랑의 진실을 온 몸으로 수행했고, 나는 그 아들을 통해 사랑의 실체를 보고 배웠다. 그리고 아들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실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달리는 그분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기에,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만이 죽음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을 향한 유일무이한 사랑의 길이기에 십자가로 향해야만 했다는 것을, 십자가를 아니 지실 수 없었던 이유를 명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통의 한 복판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아들이 말했다. 이번 간 이식 수술은 아빠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놀라웠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한없이 감사했다. 아들이 비록 지옥 같은 고통을 처절하게 겪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으니 어찌 그분의 지혜와 놀라운 능력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아들이 지난한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나뿐 아니라 아들도 사랑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이식 수술의 전 과정이 앞으로의 삶에 큰 자산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들과 나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인생의 큰 가르침과 자산을 얻고 배울 수 있었다. 실로 고통의 과정은 지난했지만 고통의 결과는 엄청난 은총이요 축복이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아들의 몸에 칼을 대지 않고 내 간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내 생각의 미천함이 심히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