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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쉽게 부의 평등을 꿈꿉니다.
하지만 부의 평등이란 실현 불가능한 망상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정한 땅 분배를 명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부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희년이라는 제도를 통해 다시금 부의 공정함을 회복시키는 전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희년제도를 이해할 때 ‘부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라고 주신 말씀으로만 읽는 것은
절반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희년제도는 ‘부의 평등’을 실현하라는 말씀임과 동시에 ‘부의 불균형’이라는 현실을 전제로 한 제도였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희년제도를 통해 ‘부의 불균형’이라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부의 균형’을 회복할 수 없다는 현실적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소유를 주창하고 실천한 간디도 부의 평등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해지지 않는 그런 시대가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서 더 부유해지기를 그만두고,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시대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부의 평등’이란 실현 불가능한 꿈입니다.
그리고 부와 가난의 문제를 풀기 위한 모든 논의는 이 전제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과연 부와 가난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이 있을까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부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은 해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부와 가난의 문제는 해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 넘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부와 가난에 대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는 정의롭지 못한 탐욕자요, 가난한 자는 게으른 무능력자라는 흑백 논리와 이분법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하면 부자건 가난한 자건 행복할 수도, 문제를 풀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증오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자를 억누르고, 가난한 자는 부자를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데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겠습니까?

  삶은 냉엄하고 신비합니다.
삶이란 빛, 기쁨, 생명, 부유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삶은 빛과 어둠, 슬픔과 기쁨, 하늘과 땅, 생명과 죽음, 부와 가난이 교차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예술입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 빛나며,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값진 것입니다.
반대로,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고, 생명이 있기에 죽음이 있으며, 기쁨이 있기에 슬픔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과 삶은 음과 양으로 존재하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와 가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와 가난의 이분법이나 부의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현실을 반영한 진실과 거리가 멉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부의 평등에 집착하는 한 상대적 빈곤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상대적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가난한 자든 부자든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건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부의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망상을 포기하고,
이분법을 넘어서야 합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넘어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입니다.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나 도움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자를 구원자로 보아야 합니다.
부유한 자의 마음과 영혼이 황폐해지고 교만해지는 것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선물로 보아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볼까요?
하나님은 나사로를 부자의 구원자로 그 집 앞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나사로를 거지로만 보았습니다.
구제의 대상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굴도 내밀지 않고 외면해버렸습니다.
그때 만일 나사로를 구원자로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결코 냉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를 따듯하게 맞이하고 주린 배를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면 나사로와 부자 모두 구원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에 대한 증오심을 넘어서야 합니다.
부자 때문에 내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물론, 정의롭지 못한 부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을 거두어들인다는 게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분노와 증오심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가난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무능력한 자라는 사회적 인식의 끈을 과감히 끊어버려야 합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가난의 영광이 부의 영광 못지않다는 것,
가난이 오히려 더 큰 자유를 선물한다는 것,
부자들을 구원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난이 갖고 있는 제사장적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흑백간의 인종 문제와 싸울 때 흑인 형제들에게 가장 많이 외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백인들에 대해 증오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1963년 9월 15일 버밍햄의 식스틴스 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주일학교 수업을 받던 흑인 소녀 4명이 죽는 사건이 터졌을 때,
네 아이를 기리는 연설에서 그는 울부짖듯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은 어둡지만, 절대로 절망하지 맙시다. 원한을 품어서도 안 되고,
폭력으로 앙갚음하겠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백인 형제들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엄청난 판단착오를 하고 있는 백인도 언젠가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킹은 말콤 액스가 폭력투쟁의 길을 걷다가 암살되는 비극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악몽은 우리에게 폭력과 증오는 폭력과 증오를 낳을 뿐이며,
‘칼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서는 원한을 품으라고 유혹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겠지만,
우리는 원한과 증오는 숙명의 날을 향하여 전진하는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는 증오심을 경계하면서
“증오는 증오의 객체에게나 증오하는 주체에게나 똑같이 해로운 것이다.
발견되지 않고 자라나는 암덩어리처럼 증오는 인격을 갉아먹고 신체의 통일성을 파괴한다.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은 대부분 증오에 뿌리를 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기회 있을 때마다 증오심을 극복하도록 일깨웠습니다.
증오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흑인들은 이 싸움에서 승리할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일깨우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흑백간의 인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흑백 이분법을 넘어섰습니다.
그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인종문제를 제대로 다룬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도 흑백간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육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자신이 당당한 인간’임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라.
사회에 나가서 ‘열등하다’거나 ‘못났다’는 말을 듣는 일이 생기더라도 언제나 당당한 태도로 맞서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 … 어머니는 남부의 일부 지역에선 아직도 학교와 식장, 극장, 주택, 술집, 대합실, 화장실 등에 흑백분리제도가 잔존해 있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일 뿐이니 이런 제도에 순응해서도 안 되고 ‘열등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내게 ‘너는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백인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백인을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의무다’라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킹이 백인에 대한 증오심을 넘어서고,
흑인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흑백 문제를 푸는 길을 제대로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편가르는 방식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습니다.
증오심을 부추기는 방식으로도 풀 수 없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진정으로 풀기 위해서는 부와 가난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합니다. 가난의 중보적 가치를 깨우쳐 알고, 가난에 대한 당당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부와 가난의 문제를 대면할 수 있고,
함께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부와 가난의 문제를 대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