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정한 영성이란?

그럼 진정한 영성이란 어떤 것일까? 어렵고 복잡할 것 같지만 사실은 단순하다. 영성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삶을 보자.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으셨다. 섬기는 자로 오셔서 사람들을 치유하고 온갖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셨다. 매인 자는 자유케 하셨다. 약한 자를 지배하고 죽이는 세상의 질서에서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도록 죄를 용서하시고 회개케 하셨다. 예수님은 진실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낮아짐의 영성, 섬기는 자리에 서는 섬김의 영성으로 사셨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또 다른 색깔의 삶이 보인다. 가나의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의 흥을 돋우셨다. 하늘을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며 깨어있는 감각으로 만물을 응시하셨다.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살면서도 동시에 사람들과 떨어져 삶을 깊이 응시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기를 쉬지 않았다.
예수님이 사신 삶의 모든 과정을 한 번 살펴보라. 마지못해 억지로 한 적이 있는가? 우울하거나 어두운 색조를 발견할 수 있는가? 오히려 밝고 아름다운 색조가 넘치지 않는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깊은 평안과 기쁨이 그분에게 있지 않은가? 그분은 세상의 죄와 어두움을 인하여 온 존재로 아파하셨다. 하지만 기쁨의 샘이 마른 적이 없으시다. 그분의 내면세계와 삶은 죽임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생명의 희열이 넘쳤다. 언제나 밝고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크고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 모습이 정겹고 반갑다. 우리 집에는 피안 대소하는 예수님의 초상이 두 개나 있다. 피안 대소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모습이 예수님 안에선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것이 영성의 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낮아짐의 영성과 섬김의 영성뿐 아니라 삶을 기뻐하는 희열의 영성과 감사의 영성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수님의 두 얼굴에서 나는 영성의 참 모습을 본다.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쟈예프는 영성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 말로 잘 압축해 표현했다. “만약 내가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신체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내 이웃이 배가 고프다면 그것은 영적인 문제다.” 나는 이 말보다 더 영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베르쟈예프는 한 마디로 백 마디를 말했다. 베르쟈예프가 말한 대로 영적인 문제는 세상이나 육체적인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초월적인 무엇이 아니라 형제와 관련된 모든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이웃의 문제가 나에게는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했다. 예수님은 항상 세상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면했다. 사람들의 질병과 얽매인 삶을 해방시키기 위해 땀을 흘렸다. 배고픈 자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어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다.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은 철저하리만큼 배격했지만, 사람들의 아픔과 고난, 죄와 어둠, 착취와 굴욕에 대해서는 해방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의 삶과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지 않았다. 사람들의 삶의 질곡 속에 깊이 참여했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야합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휘둘리거나 따라가지도 않았다. 사람을 지극히 섬기고 사랑했지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사람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요2:24).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나라와 세상이 함께 들어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성이다. 그리고 이 영성이야말로 진정한 영성이다.

이런 영성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에 눈을 떠야 한다. 조지 바나는 “성경적 세계관이 없다면, 어떤 위대한 가르침도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나가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런 진리들을 걸어 둘만한 지식의 못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가버리고 만다. 머무르지 못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우리가 참 영성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세계관이 거듭나야 한다. 세계관이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세상의 가치관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믿음으로 더 큰 성공을, 믿음으로 더 많은 돈을, 믿음으로 더 오랜 장수를, 믿음으로 더 큰 승리를 쟁취하려 든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아마 신앙의 세계에서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은 믿음보다 더 위험한 물건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열심을 강화하는 신앙 훈련만으로는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 바울은 로마의 형제들에게 편지하면서 중요한 말을 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마음’은 ‘heart’가 아니라 ‘mind’다(KJV, NIV). 만일 ‘heart’로 읽으면 '의지'나 '마음먹기'를 바꾸라는 말로 뜻이 왜곡되어 버린다. ‘mind’로 읽어야 '생각'과 '정신'을 새롭게 하라는 뜻으로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사실 ‘heart’는 주변 상황에 민감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흔들린다. 날씨에 따라 변하고, 한 곡조 노래에도 출렁인다. 반면에 ‘mind’는 바뀌는 게 쉽지는 않지만 일단 한 번 바뀌면 여간해서 유턴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mind'가 변하면 변화의 능력이 삶의 깊이에까지 미치고, 변화의 파급효과가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전달된다. 무엇보다도 변화된 삶이 지속성을 갖는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면 반드시 ‘mind’가 변화되어야 한다. 세계관이 거듭나야 한다. 신앙이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반듯하게 제 길을 가려면 반드시 성경적인 세계관에 눈떠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눈을 떠야 한다. 어쩌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창조 신앙을 고백할 것이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앙 공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조신앙은 만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되어야 한다. 길가에 핀 개나리 한 송이에서, 모래알 하나에서, 하늘을 가르는 새들에서,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에 감탄하고, 창조 속에 깃든 그분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보든지 항상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창조의식’이 따라 다녀야 한다. 그래야 창조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눈을 뜨면 만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 하여 어떤 피조물에도 폭력을 가할 수 없게 된다. 함부로 낭비하거나 해치지 않게 된다. 종이 한 장, 한 잔의 물까지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게 된다.

나는 “동물기”로 유명한 시튼이 편찬한 “인디언의 복음”이라는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책에 의하면 인디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 허기를 채우는데 필요한 양만큼만 열매를 따고, 열매를 맺는 나무나 덤불을 손상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한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사냥감을 결코 잡지 않으며, 죽인 것은 모든 부분을 다 먹는다. 그들은 죽이고 낭비하는 사악한 쾌락을 위해 사냥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시튼은 그 책 서문에서 “백인 문화와 문명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모았는가 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이다. 인디언의 문화는 그 본질이 영적이다. 내가 동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 하는 것이 인디언들의 성공 척도이다.”라고 매우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미국 대평원의 정찰대원으로, 들소 사냥꾼으로 인디언들의 삶을 지켜보았던 버팔로 빌은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정부, 그리고 국가가 부끄럽다. 인디언들이 언제나 옳고 우리가 언제나 그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협정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반해 우리는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이건 인디언의 고백이 아니다. 인디언을 몰아 낸 백인의 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이 고백을 듣고 부끄럽지 않을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있을까?
인디언들은 진실로 남의 것을 훔치거나 지배하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이익과 편리함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었고, 모두의 것이었다. 자기 세대만 아니라 온 세대의 것이었다. 나는 인디언의 삶을 읽고 하나님의 창조에 눈뜬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인디언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우리가 고백하는 창조 신앙이 얼마나 허접스런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창조 신앙은 성경과 입술에서 일상으로 튀어 나와야 한다. 그래야 만물을 지배하는 삶에서 만물을 품는 참된 영성적 삶으로 전환할 수 있다.

셋째, 나를 보는 눈을 떠야 한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라는 자아 인식에 눈을 떠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자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어려움을 만나도 절망하지 않고, 상처를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자부심으로 이겨낼 수 있다. 사랑받는 자가 될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용기를 얻는다.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인식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또 내가 죄인임을 알 때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다.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나는 죄인이라는 ‘죄인의식’과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녀의식’에 눈을 뜨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 고고하게 자신의 자신됨을 유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그때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이 보인다. 타인은 더 이상 ‘그’가 아니라 ‘너’가 되며, ‘그’가 ‘너’로 바뀌면 타인을 지배하지 않을 수 있다.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는 것으로 보았던 엔리케 뒷셀은 “하나님나라는 강제를 일삼는 나라가 아니고, 지배자의 사회도 아니며, 구성원들의 공동선을 위한 이기적인 상호부조의 연관도 아니다. 하나님나라는 서로 타인을 개방적으로 섬기는 공동체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진실로 지배가 아닌 섬김의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나와 너를 보는 눈을 떠야 한다.

넷째, 삶에 눈을 떠야 한다. 삶에 눈을 뜨면 온 삶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된다. 일상 속에서 감사와 경축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삶에 눈을 뜨면 공기, 나무, 구름, 흙, 물, 이웃, 가족, 작은 밥상,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꽃들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이 그분이 건네 준 선물이라는 사실이 보인다.
물론 삶에 눈을 뜬다고 해서 삶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삶의 질곡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온통 사랑의 선물보따리로 바뀐다. ‘선물의식’과 ‘감사의식’으로 충만하게 된다.
또 삶에 눈을 뜨면 삶이 소유나 업적보다 더 훌륭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된다. 업적이나 경쟁에 휘둘리지 않고 삶을 옹골차게 살 수 있게 된다. 앞에서 말한 인디언들처럼 삶에 충실할 수 있다. 그리고 삶에 충실할 때 나눔과 섬김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의 품격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품격을 잃지 않고 삶에 충실한 것, 이것이 바로 영성 아니겠는가.

다섯째, 구원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신앙에서 우주적 구원을 보는 눈을 떠야 한다. 그래야 세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세계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삶 전체를 아우르는 일상의 영성으로 살 수 있다. 개인의 우물에 갇힌 신앙은 아무리 뜨겁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세계를 살아내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진정한 영성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관계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다섯 가지 진실에 눈을 떠야 진정한 영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영성에 눈을 떠야 삶을 쟁취해야 할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삶이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선물임을 알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삶에 충실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선을 행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구속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이 말씀처럼 진정한 영성에 눈뜬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따라 자기 삶을 사용하기를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 욕망으로 삼는다. 이렇게 욕망이 거듭나야 진정한 영성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을 보는 눈을 떠야만 다섯 가지 진실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고로 모든 진실을 보는 눈은 하나님의 계시의 은혜로만 열릴 수 있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암튼 나는 영성을 ‘하나님을 통해서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만사를 이해하며, 하나님과 함께 온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