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성의 색깔

하나님 세계의 최고 특징이 무엇일까? 전능한 것일까? 영원한 것일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는 편재일까?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일까? 끝없는 다양성일까? 아마도 다양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빙 둘러보라. 그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다채로운가. 조금만 유심히 세상을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다. 선인장 한 가지만 봐도 그 모양과 색깔이 천태만상일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은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선인장을 보고 있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기가 막히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입이 쩍 벌어진다. 바다 속 물고기들도 보라. 집채만한 고래부터 새끼손톱만한 것까지 제각각 고유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고기들이 다 비슷한 것 같지만 그 형태가 얼마나 다양한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어떤 미술가도 그릴 수 없는 색들이 조합되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고기들의 빛깔은 정말 바다 속 비경이 아닐 수 없다. 계절마다 가지를 밀고 나오는 잎들과 꽃봉오리들은 어떤가? 잎과 꽃의 모양과 색상이 얼마나 다채롭고 휘황찬란한가! 끝없는 우주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 봐도 창조의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예술가 중에 예술가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수 억, 수 조, 아니 그 수를 헤아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무한한 다양성의 세계다.

사람은 다양성의 차원이 또 다르다. 60억이라는 사람이 지구촌에 살고 있지만 그중에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아니, 지금껏 지구촌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나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오직 나 하나다. 쌍둥이도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만의 개성과 향기가 있고 고유한 색깔이 있다.
영적인 기질도 마찬가지다. 게리 토마스는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는 책에서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듯 영적인 기질도 다르다고 말하면서 영성의 아홉 가지 색깔을 말했다.

야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연주의 영성.
오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각주의 영성.
의식과 상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전통주의 영성.
고독과 단순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금욕주의 영성.
참여와 대결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주의 영성.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박애주의 영성.
신비와 축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주의 영성.
사모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묵상주의 영성.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성주의 영성.

이렇게 아홉 가지 영성의 색깔을 말하면서 게리 토마스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마땅히 다양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은 영적 처방을 주는 것은 의사가 모든 환자에게 페니실린을 처방하는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처사라고 말한다. 백 번 옳은 말이다.
물론 게리 토마스가 말한 아홉 가지 영성의 색깔이 영성을 분류하는 유일한 잣대일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는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본받음의 전통, 기도로 충만한 묵상의 전통, 덕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는 성결의 전통, 성령 충만으로 능력을 받는 카리스마의 전통, 자비를 실천하는 사회 정의의 전통, 복음 전도의 전통, 성육신의 전통, 이렇게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형태의 분류가 있을 수 있다. 암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영성의 색깔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게리 토마스는 아홉 가지 영적 기질을 말하면서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영적 기질이 있으며, 전부는 아니라도 다양한 영성을 고루 갖춘 사람일수록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영성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경우가 그렇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아홉 가지 영성의 색깔이 아름답게 발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 때 그 때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적절한 영성으로 대응하시고 일하셨다. 병자를 치유하실 때는 박애주의 영성으로, 홀로 기도할 때는 자연주의 영성과 묵상주의 영성으로, 말씀을 가르칠 때는 열정주의 영성과 지성주의 영성으로, 종교지도자들과 종교적 전통주의자들에게는 행동주의 영성으로, 모세 율법을 지키셨던 전통주의 영성까지 두루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를 아우르는 영성을 갖고 계셨다. 예수님뿐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최대한 다양한 영성을 갖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영성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책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도 안 된다. 또 헌신이라는 당위로 영성의 색깔에 맞지 않는 일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일상의 신비를 깊이 들여다 본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인위적이고 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르고 영적 기질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무조건 헌신하고 주어진 일에 나서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이며, 영성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난 후 사역에 나서도 결코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 선교적 삶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 선교도 그 사역에 잘 맞는 영성이 분명히 있다. 사회 선교적 삶을 사는데 적절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창조적으로 잘 감당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개개인의 은사와 영적 기질을 점검하고 확인해서 영성의 색깔에 맞는 사역을 찾고 지원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공동체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5. 신앙과 정의로운 삶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때 놓치지 않아야 할 원칙이 있다. 신앙은 신앙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영적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신앙은 하나님을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주어진 선물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했다. 가장 심원한 신앙적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배와 금식과 관련해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제물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살진 짐승을 바치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열심을 다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작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이 마음 다해 드리는 제사가 싫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란다(사1:11-15). 금식도 그렇다. 그들은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아 금식을 했다. 그러나 금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향락을 찾고, 노동을 착취하고, 서로 다투었다. 그러니 그게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 굶주린 자에게 먹거리를 나눠 주며 떠도는 빈민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형제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사58:3-7).
이사야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소위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무조건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약한 자를 배려하고, 함께 나누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종교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한 삶이 진짜 금식이요 진짜 예배라고 하신다.

미가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허울을 꼬집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무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기뻐하실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할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할까를 놓고 머리를 굴렸다. 즉, 종교적인 뇌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은 오직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6-8)을 기뻐하신다고.
여기서 미가 선지자가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 가지 덕목을 그냥 나열한 건 아니다. 세 가지 덕목은 서로 연결고리로 묶여 있는 하나다. 어떤 덕목도 다른 덕목이 없이는 그 빛을 발할 수 없을 정도로 셋은 하나로 묶여 있다.
잠깐 생각해 보자. 공의를 실천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자비가 없는 정의를 생각해 보라. 얼음처럼 차갑고 짐승처럼 냉혹한 정의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비가 없는 정의는 때로 내편이 아닌 것을 무차별 공격하고 사살하는 불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무서운 인종청소(독일 나치의 유대인학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계의 무슬림학살)는 자비가 없는 정의가 저지른 인류 최대의 죄악이었다. 세상에 자비 없는 정의보다 더 무서운 칼은 없을 것이다. 또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데서만 그 힘이 주어진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자가 자비와 공의를 행할 수는 없다. 한편 공의가 없는 자비는 어떤가? 공의가 없는 자비는 감상적이고 나약한 것이 되기 쉽다. 착취적인 경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서 착취적인 경제 구조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남녀를 차별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하면서 여성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도 진정한 자비라고 할 수 없다. 자비에는 언제나 공의가 동반해야 한다.
이처럼 각각의 덕은 서로를 통해서만 고유의 덕을 실천할 수 있고, 덕이 오용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공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다.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같은 말씀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했다(마5:13-14).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형제와 불화한 일이 있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고 했다(마5:24).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마5:44). 사도 바울은 피차 돌아보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주님을 사랑하라고, 덕을 세우라고 했다(롬12장).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다(요일4:20).
이처럼 신약이나 구약의 모든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자매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진리가 일관되게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눈에 보이는 모습은 달라도 실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결국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을 품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은 결코 세상과 분리되거나 세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

6. 사회선교와 영성의 상관관계

우리가 사회선교적 삶을 살고자 할 때 가장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직장이나 친구들이나 세상의 체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도 모두 싸워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월터 윙크는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방대한 책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에 대해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권세들이란 가시적인 동시에 불가시적이고, 땅의 것인 동시에 하늘의 것이며, 영적인 동시에 제도적인 혹은 구조적인 것이다. 권세들은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표현을 갖고 있기도 하고, 또 내적인 영성, 회사의 문화, 집단적 인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고 진실을 정확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내 안에 있는 성공에 대한 욕망, 빨리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과 싸워야 하는 이 내적 싸움이야말로 날마다 직면해야 하는 진정한 싸움이다. 우리의 진짜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다(엡6:12).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과의 싸움이요, 어둠의 영들과의 싸움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이 진짜 싸움이다.
만일 보이지 않는 내적 욕망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사회선교란 허상이 되고 말 것이다.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회선교적인 삶을 순전하게 살 수 있겠는가? 또 하나의 ‘경건사업’, 또 하나의 ‘사회사업’이 되지 않겠는가? ‘사회선교’가 진정한 ‘사회선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사회사업’의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에서 판가름 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를 풀어주는 힘의 근원은 어디에서 나올까?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만이 욕망의 사슬을 끊고 자유케 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을 보아야만 그 부요함으로 인해 세상 욕망을 끊을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에게 베푸신 구원의 축복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고 누리는 자라야(엡1:18) 자기 이익에 굶주리지 않는 자가 될 수 있고, 자기 이익에 굶주리지 않는 자라야 욕망에 붙잡히지 않고 사회선교에 매진할 수 있다.

사회선교와 영성의 상관관계를 바라보는 입장을 정리해 보자.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영성을 사회선교의 추동력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회 선교적인 삶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과 충실한 교회생활을 통해 영적인 에너지를 공급받고, 강한 비전과 영성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뜨거운 영성이 사회 선교적인 삶을 이끌고 가는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약점이 있다. (1) 영성 우선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영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자칫 우선순위에서 영성에 밀려 사회선교적인 삶은 뒷북을 치고 영성의 확보에만 전전긍긍 매달리는 형국을 면치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물론 영성이 사회선교의 추동력이 되어야 하고, 영성이 사회선교의 토대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영성이 사회 선교의 토대라는 것과 영성이 사회선교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영성 우선주의는 영성을 훈련하고 영성을 확보하는 데만 매달리는 영성 환원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영성에 발목이 잡혀서 영성 외에는 다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
(2) 신앙을 심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하는 쪽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많다. 사회선교적 삶을 위해 신앙을 뜨겁게 하고, 사명감과 헌신의 강도를 높이는 쪽에 신앙훈련을 집중하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신앙적 열정과 다이나믹을 이끌어내고, 헌신의 강도를 높이는 데는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참 묘한 것은 신앙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사회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불같은 사명감으로 열심을 다하는 것도 좋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좋은데, 이런 신앙은 자칫 일 자체에 지나치게 선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사명이라는 굵은 띠로 자기를 꽁꽁 묶어 일에 임하는 자세가 경직되거나 필요 이상의 짐으로 스스로를 짓누르는 경우가 많다. 또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이 지나치면 자기 독선에 빠질 수도 있다. 이처럼 지나친 사명감과 지나친 열정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게 눈을 가로막아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거칠고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기 쉽다. 뜨거운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본 나머지 사람을 보지 못하기 쉽다. 그래서 사람을 돌보아야 할 사회선교적 삶의 과정에서 사람을 해치고 상처를 가하는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강화하는 ‘영성 우선주의’가 아니라 신앙을 심화시키는 ‘영성 토대주의’에 굳건히 서야 한다.

둘째, 영성을 사회 선교의 태도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회 선교에 접근하는 자세와 동기를 중시한다.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때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를 영성의 중요한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에 덤비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태도로 일을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일 자체에 있지 않다. 일에 참여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것이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또한 일에 임하는 자세, 일하는 태도, 일을 하는 과정도 역시 일보다 더 영적인 의미가 있다. 이처럼 영성을 사회선교에 임하는 동기와 삶의 태도로 이해하는 관점은 다음의 진실을 잊지 않는다. 최고의 영적 증언은 '일'이 아니라 일을 하는 '나'라는 진실을.

앞에서 말한 두 관점은 사실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두 관점이 다 필요하다. 내면세계의 동기와 태도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외면적인 행동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고, 또 외면적인 행동 없이 내면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도 문제다.
열정적인 사회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뜨거운 헌신의 열정이 뒷받침 돼야 하고, 사회선교적 삶이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건강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의 동기와 일에 임하는 태도를 돌아보는 영적인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결국, 첫 번째 관점은 두 번째 관점으로 보완되어야 하고, 두 번째 관점은 첫 번째 관점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그럴 때 사회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도 바른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사회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사람들에게 영적인 깨우침을 준 영성의 사람 중 한 사람인 헨리 나웬은 일에 쫓겨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경계의 메시지를 들려주었다. “한적한 곳을 모르는 삶, 고요가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쉽게 파괴된다. 우리가 자아의식을 오직 활동의 결과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소유욕만 커지고 늘 방어 태세가 되어 언제나 이웃을 멀리 두고 경계해야 할 적으로만 간주할 뿐, 삶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나누어 갖는 친구로 여길 줄 모르게 된다. 우리가 홀로일 때 소유욕이라는 환상의 탈을 벗고, 우리 내면에서 삶이란 우리가 정복한 결과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헨리 나웬의 이 목소리는 사회선교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명상이 없이는 충분히 행동적일 수 없고, 어느 정도의 행동 없이는 충분히 명상적일 수 없다.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