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복음전도와 사회선교

사회선교를 논하면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있다. 그것은 복음전도와 사회선교(사회적 책임)와의 상관관계 문제다. 일찍이 복음주의자들은 1974년 ‘로잔언약’에서 ‘기독교적인 사회적 책임’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서 “복음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가지 부분”이라고 발표했다. 그 후 1982년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간의 관계에 관한 협의회’가 미국의 그랜드 래피드즈에 모여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 간의 관계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했다. 논의의 결과가 ‘그랜드 래피드즈 보고서’로 정리되어 나왔는데 그랜드 래피드즈 보고서는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회 선교는 복음 전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면 인간이 변화되고, 사회와 민족을 개혁하는 역사가 뒤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둘째, 사회 선교는 복음 전도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웃의 삶에 애정을 갖고 돌아보며 섬기면 교회에 대해 편견이나 의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 선교는 복음 전도의 동반자로서 복음 전도와 병행한다는 것이다. 비록 사회 선교와 복음 전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복음 전도는 사회적 의미를 갖고, 사회 선교는 복음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사회 선교와 복음 전도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좀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회 선교가 복음 전도의 다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복음 전도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은 종종 복음전도로 연결되지 않는 사회선교가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선한 일은 될 수 있으나 휴머니즘으로 흐르기 쉽다고 비판한다. 또 복음의 정신을 이탈하기 쉽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염려다. 사회 선교는 하나님나라의 생활양식(Life Style)을 증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건 복음 전도가 증언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증거 사역이다. 그런데 사회 선교가 복음 전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칫 사회 선교의 순수성과 고유한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사랑의 사역과 아름다운 섬김이 자기네 종교 세력을 확장하고 개종시키려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을 증거하는 위대한 증거가 오해의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예수님의 삶을 보라. 예수님의 삶을 보면 사회 선교와 복음 전도가 병행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과 함께 병 고침, 귀신 축출, 오병이어의 기적,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죄인들과 함께 하는 등 사회 선교 사역들도 했다. 복음 전도와 사회 선교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지도 않았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지도 않았다. 언제든지 두 가지 사역이 각각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면서 동시에 함께 진행되었다. 사회 선교 사역이 복음 전도의 수단이었던 적이 없다. 섬김과 돌봄의 사역이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하나님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길이었기에 행한 것이지, 그걸 고리로 복음 전도를 하려고 하신 건 아니었다.
사람이 본래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존재다. 두 가지 사역을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해낸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여 사람들은 자꾸만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게 쉽고, 그게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이기 때문에 하나는 접어놓고 나머지 하나만 붙잡고 씨름한다. 그러나 두 가지 사역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시간이 가면서 사회선교는 복음전도에서 멀어지고, 복음전도는 사회선교에서 멀어지게 되는 걸 피하기 어렵다. 그리고 둘 사이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차 두 사역은 다같이 힘을 잃게 된다. 복음 전도와 사회 선교가 새의 양 날개처럼 함께 움직여야만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향해 비상할 수 있다.

8. 사회선교와 일상의 영성

지금까지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다면 ‘일상의 영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일상의 영성’이야말로 최고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통합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의 작가 체스터톤이 말했다던가. “당신은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한다.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나는 연주회와 오페라를 보기 전에 기도하고, 연극과 팬터마임을 보기 전에 기도하며, 책을 펼치기 전에 기도하고. 스케치, 그림그리기, 수영, 펜싱, 권투, 산책, 놀기, 춤추기 전에 기도하며, 펜을 잉크에 적시기 전에 기도한다.”
평생을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며 살았던 로렌스 형제는 이렇게 고백했다. “꼭 큰 일을 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나는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게 되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설사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로렌스 형제는 기도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중대한 과오라고 믿었다. 경건의 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그분과 연합되게 한다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다른 활동들도 우리를 그분과 하나되게 해야만 한다고 그는 믿었고, 그렇게 살았다.

진실로 그렇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아침의 커튼을 올리며 하루를 선물로 맞고, 사랑과 축복의 눈길로 가족을 바라보고, 감사의 마음으로 식탁을 대하고, 옷매무새를 만지며 출근 준비를 하고,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을 미소로 대하고, 사소한 일상들을 해치우지 않고 주께 하듯 하며, 모든 걸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다가 하나님과 함께 하루의 커튼을 조용히 내리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삶이요, 최고의 영성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영성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딴 세계의 영성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과 같은 영적 고수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밥상을 대할 때 기묘한 맛과 색과 향을 가진 음식들을 인하여 감탄할 수 있으면 그 길이 멀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감사와 긍휼의 마음을 잃지 않는 민감성이야말로 중생한 자의 참된 영성이요, 모든 사역의 토대가 되는 영성의 기본이라고 믿는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영적, 육체적 감각이 둔화되어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삶을 사는 것보다 더 비영적인 것은 없다고 믿는다.

오늘 교회는 교회 안에 갇힌 종교적 영성, 개인주의적 영성, 부분적인 영성의 우물에서 빠져 나와 최고의 영성이요, 통합의 영성인 ‘일상의 영성’으로 성도들을 인도해야 한다. 임어당은 “어떤 문명에 대한 마지막 가치 판단은 그 문명이 어떤 모양의 남편과 아내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들어 냈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문명뿐 아니다. 교회의 성패도 역시 크고 대단한 일보다는 아주 작은 부분, 어떤 모양의 남편과 아내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진정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양으로 일상을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지 않은가.
교회가 그리스도인을 ‘일상의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눈감은 영성’에서 ‘눈뜬 영성’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일상의 영성을 중시한 마이클 프로스트는 교회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교회가 그 이름에 합당한 역할을 하려면, 교회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문(指紋)을 보는 법을 배우는 훈련의 장이 되어야 하며, 탐구자와 추구자, 질문자와 같은 이들이 과연 하나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자신에게 눈길을 보내시는지 발견하려고 적극적으로 애쓰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한다.” 아멘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 사회 선교라는 게 뭐겠는가? 일상에서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사회 선교의 본질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