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기적(막5:21-6:6)

  산다는 것은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동시에 뜻하지 않은 재난을 피할 수 없고, 원하지 않는 고통과 씨름해야 하는 가시밭길이기도 하다. 삶이란 참으로 냉정해서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굴러가지도 않고 원하는 일만 일어나지도 않는다. 어쩌면 원치 않는 일들에 붙들려 끌려가는 것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삶은 거칠게 사람을 다루는 것 같다. 삶을 사는 것은 정녕 사람인데, 사람이 삶을 휘두르기보다는 오히려 삶이 사람을 휘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믿음을 가진 자들은 삶의 냉정함에 휘둘릴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과 기적 같은 해결을 기대하며 믿음에 매달린다.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에 귀의하는 것도 신앙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을 때 믿음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회복되기를 사모한다. 정신지체아를 둔 부모는 새벽마다 기도하며 정상아로의 회복을 열망한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와 장애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어 극복하고 싶어 한다. 특히 성경에는 수많은 이적과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지라 나에게도 성경에서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들이 있다.
  이처럼 믿음과 기적의 문제는 현실적이고도 일상적인 신앙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이다. 하지만 믿음과 기적의 상관관계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회당장의 믿음 없음과 딸의 회생

  일단은 성경 속으로 들어가 믿음과 기적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가버나움의 회당장 중에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심한 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어린 딸이 죽음의 경각에서 신음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애끓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고 살려주십시오.”(5:23) 하며 발아래 엎드려 간곡히 청했다. 재난의 소식이라면 결코 허투루 듣는 법이 없으셨던 주님께서는 두 말 하지 않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십 이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 옷에 손을 댐으로써 치유를 받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가던 길이 잠시 지체되었는데, 바로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어린 딸이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그러지 않아도 노심초사 마음이 급했는데 두려웠던 소식을 접하자 회당장은 넋이 나간 듯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기막힌 현실,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결국 눈앞에 닥친 것이다. 그런 현실 앞에서 회당장은 차라리 두 눈을 감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서운 것. 두 눈을 감고 싶어도 감을 수 없고, 감아서는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눈을 뜨고 해쳐나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이란 그렇게 냉정하고 무서운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계속 모시고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은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뭐하겠습니까?”(5:35)라고 말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모시고 갈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예수님이 꺼져가는 목숨의 마지막 불꽃은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불꽃이 완전히 꺼져버린 뒤에는 다시 타오르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의 한계였다. 회당장도 어쩌면 같은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이 저들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5:36)고 말씀하신 걸 보면 회당장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한 것 같아 보인다. 암튼,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믿기만 하라’고, 방금 전에 십 이년이나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내 옷에 손을 대 나은 것처럼 네 어린 딸도 내가 살려낼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격려하듯 말씀하시고는 회당장의 믿음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부지런히 앞장서 길을 가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은 벌써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5:39).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너무 황당한 나머지 놀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웃어버렸다. 하지만 예수님은 괘념치 않고 아이의 부모와 제자 셋만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시더니,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는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소녀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일어나 걸어 다녔다. 놀라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최초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회당장과 그의 가족, 시중드는 사람들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죽은 딸을 살려낼 거라고는 믿지 못했는데 소녀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의 믿음과 치유

  십 이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다하고 재산도 탕진했지만 아무 효력을 보지 못한 채 죽음 같은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여인은 소문을 듣자말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몸은 이미 길거리로 뛰쳐나가 있었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 있었다. 부끄러움도, 수치도, 아픔도 잊은 채, 불결한 병이라는 편견의 벽도 뛰어넘어 무리 가운데 합류한 여인은 손을 내밀어 예수님 옷을 만졌다. 실수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웬 조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렇게 행동하게 한 것이었다. 본인도 억제할 수 없는 어떤 확신에 이끌려 예수님 옷에 손을 대자 말자 신기하게도 출혈의 근원이 말라붙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순간 자기 몸에서 능력을 나간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예수님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게 스치듯 옷깃만 만졌는데 예수님은 밀고 밀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알고 계셨다. 그 여자는 그런 예수님이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여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이 사실대로 자백하자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씀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놓여 건강하여라.”(5:34). 이미 병은 떠났는데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여인의 질병이 치유되었음을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여인을 찾아 이 말씀을 선포하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해줌으로써 그 여인의 마음속에 꿈틀댔던 것이 믿음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싶으셨다고 생각한다. 둘째, 주님께서 “이 병에서 놓여 건강하여라.”고 하신 것은 십 이년동안이나 형벌처럼 끌어안고 짓눌렸던 ‘불결한 혈루병을 가진 여인’이라는 사회적 멍에로부터도 완전하게 해방시켜주고 싶으셨다고 생각한다. 만일 예수님이 여인을 찾지 않았다면 그 여인은 치유받은 은혜를 홀로 간직한 채 떠나려 했을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면 그 여인은 절반의 축복만 받은 채 가버렸을 것이다. 육체적인 치유만이 주님께 받을 은혜의 전부가 아닌데 절반의 축복만 받고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님은 온전한 치유와 해방의 축복을 선포하기 위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인가! 한 사람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깊고도 세심한 배려! 바로 이런 모습이 그분의 탁월함의 정수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과연 여자의 어떤 행동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하셨을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믿음을 고백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뭘 근거로 믿음이 있다고 하신 것일까?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아도,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해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예수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기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일 수 있을까?
  칼빈은 신앙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성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와 자비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지식이다.”고 정의했다. 리델보스는 “기독교 신앙은 단지 사실들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 사실들의 의의를 믿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지 학적인 것이나 신학적인 박식을 우선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르침과 지식이 없는 신앙이 있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삶에 대한 새로운 방법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삶, 인간, 역사, 시대, 미래와 세상에 대한 지식이기도 하다.”(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 119)고 말했다.
  이들이 말한 대로 기독교 신앙이 지식은 아니지만 지식이 없는 것도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앙은 거룩한 지식, 지혜의 지식을 가졌을 때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여자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예수님께 달려 나와 옷깃을 만진 것 외에는 믿음의 구체적 증거가 보이지 않는데, 신앙의 초보적인 지식조차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은 믿음이 있다고 하시니 그 여인에게 있었던 믿음의 실체가 뭔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과연 믿음이 무엇일까?

  이 여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분명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뭔지는 모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이라면’, ‘그분이라면 내 병을 낫게 할 것 같다’는 어떤 확신, 어떤 신뢰가 생겼을 것이다. 그 확신과 신뢰는 적극적인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각하고는 괘가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희망사항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단순한 희망을 넘어 내적인 확신과 신뢰의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확신과 신뢰가 여인으로 하여금 불결한 병이라는 편견도 뛰어넘게 했고, 사람들 틈에 뛰어 들어가 예수님 옷에 손을 대게 한 용기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분이라면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님께서 그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도 바로 이런 생각을 꿰뚫어보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믿음이라는 것이 신령한 지식 위에 서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신령한 지식이 부족해도 예수님께 인정받고 용납받는 신앙으로 부족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온전한 신앙으로는 부족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두 사건을 유심히 살펴보면 한 가지 분명하게 대비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믿음이 있었던 반면(온전한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회당장은 믿음이 없었다는 점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의 경우엔 여인의 믿음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회당장의 경우엔 회당장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지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이다. 회당장은 그저 예수님을 따랐을 뿐이다.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따랐는지, 예수님을 말리지 못해 소극적으로 따랐는지,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따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적극적인 믿음이 있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고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을 보면 혈루증 앓던 여인 못지않은 믿음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회당장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는 이적은 매우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야 믿음이 있었으니까 치유의 이적을 경험하는 게 당연했다지만 회당장은 그만한 믿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놀라운 이적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또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몇몇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신 것 외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향 사람들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라며 예수님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의혹의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행하지 못한 채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다.”는 말씀만 씁쓸하게 던지고는 멋쩍게 돌아서야 했다(6:1-6).

믿음과 이적의 상관관계

  정리해보면 이렇다. 혈루증 앓던 여인의 경우엔 믿음이 있어서 치유를 받았고, 회당장의 경우엔 믿음이 없었어도 죽은 딸이 살아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고향에서는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꽤 복잡하다.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사람들은 보통 믿음이 강한 곳에 능력도 강하게 역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반적인 생각과는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다. 하여, 믿음과 이적의 상관관계를 3가지 범주로 묶어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믿음이 이적의 조건이 되는 경우가 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고, 고향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유무가 예수님의 능력 행함 여부를 결정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능력을 행한 게 아니라 사람의 믿음이 상호작용을 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사람의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믿음이 능력을 방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행하신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는 이런 경우가 매우 많이 나온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일(막1:40-44), 게네사렛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막6:53-56), 갈릴리에서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치신 일(막7:31-35), 벳새다의 눈 먼 사람을 고치신 일(막8:22-26) 등 대부분의 치유가 믿음과 간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관점을 갖고 있다. 교회에서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예수님의 능력 행함이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
  죽은 회당장의 딸과 나사로를 살려 낸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바다에 풍랑이 일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여 제자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다(막4:35-41).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도 그 사람에게서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침을 받았다(막3:1-5). 오병이어의 기적도 믿음과 상관없이 일어난 기적이었다(막6:30-44). 이처럼 어느 때는 하나님의 계시적 필요에 의해서, 어느 때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기 위해서 믿음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적을 행하실 때가 있다.  

  셋째,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 이적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애굽의 바로에게 가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내겠으니 가라고. 하지만 모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고, 자기에게 여호와가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며 엉덩이를 뺐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는 이적을 보여주시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희게 되는 이적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네가 하는 말도 믿지 않고, 첫 번째 이적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다. 그들이 이 두 이적도 믿지 않고, 너의 말도 믿지 않으면, 너는 나일 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나일 강에서 퍼온 물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출4:8-9)고 하시며 모세를 설득하셨다.
  여기서 무엇 때문에 기적이 등장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하는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고 있다. 저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처음부터 모세의 말을 믿었다면 굳이 기적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이미 믿고 있는데 무슨 기적이 필요하겠는가. 이처럼 믿음과 이적의 상관관계는 하나의 방정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똑같이 위암 판정을 받았다고 하자. 한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해서 암이 나았고, 한 사람은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왜 한 사람은 믿음으로 나았는데, 한 사람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낫지 않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질병 치유를 위해, 자녀의 바른 성장을 위해, 우울증에 빠진 지체를 위해, 개인적인 사업을 위해 대단한 믿음으로 기도하는데,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왜 믿음으로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일까? 예수님의 옷 가에다 손을 댄 사람들도 다 나음을 입었는데 그들보다 믿음이 적어서일까? 또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선교를 하는 나라에서보다는 선교지에서 더 많은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저들의 믿음이 순수해서일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의문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믿음이 부족해서 낫지 않은 거라고 습관처럼 해석하고 만다. 믿음에는 기적이 따른다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는(약5:15) 하나의 답 외에는 달리 해석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 성경과 현실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정식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양한 방정식보다는 익히 알고 있는 정답만을 고집하는 습관에 길들여 있다. 믿음을 기적과 직결시키는 데만 익숙하다. 그러다가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닥치면 실망하고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는다. 하나님의 다양한 현실을 적절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한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행하신다. 그러나 어쩌면 믿음이 좋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믿음과 기적은 결코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한 믿음은 굳이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니까. 이와 관련해서 풀러(Fuller)는 ‘이적은 유아기 교회의 강보’라고 재미있게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장성한 신앙의 사람이 입을 옷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 믿음은 이상하게도 기적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이 기적을 사라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믿음을 기적과만 직결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믿음은 삶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어야지 종교적인 기적의 세계와만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으로 포섭하는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추구해야 할 것도 이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삶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적이 지향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칼라스(James Kallas)는 ‘예수님의 비유와 설교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언어적인 선포였다면 기적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적들은 결코 겉치레를 위한 것이 아니며, 그것들 자체와는 전혀 무관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도 아니다. 기적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나라를 실현시키는 것이며,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악한 세력을 패주시키는 것이다! …… 치유와 귀신 축출의 기적들은 하나님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 하나님이 도난당했던 그의 세상을 재창조하고 회복시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표적들이다.”(공관복음서 기적의 의미. 135)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칼라스가 지적한 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귀신 축출과 기적은 매우 중요한 하나님나라 임재의 표적이었다. 그러나 기적이 곧 믿음의 증거로 등장한 적은 없다. 성경 어디에도 기적이 믿음의 증거로 사용된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셨다고 해서 기적이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과 기적이 믿음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적으로 믿음을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믿음에 기적이 따르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감독 트렌취(R.C.Trench)는 말했다. “이적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마치 이적을 행하지 못하면 성자가 아니고, 이적이 없으면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에 이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영적으로 빈곤한 것으로 여겨 이적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이적은 형편없는 것 같이 여기고 능력의 이적만이 매력적인 것으로 여길 때는 은혜의 이적을 거의 모르는 것이다.”(예수님의 이적. 286).
  그렇다. 이적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은혜의 이적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이적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려 하거나, 증명 받으려고 하는 것도 은혜의 이적을 모르는 행동이기는 매양 같다. 그리스도인은 이적을 도외시하거나 경원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을 의심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이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 이적 또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는 표징으로 시행된 것이지 그 이상의 무엇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목해야 하는 것도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천국이 어떤 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천국이 기적이 없는 세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국은 기적으로 가득한 세계가 아니라 기적이 필요 없는 세계일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