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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철학자 라 로슈푸코는 “자기애(自己愛)의 집착만큼 뿌리가 깊고 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또 “자기애의 욕망만큼 격렬한 것은 없고, 이것의 의도만큼 은밀한 것은 없으며, 이것의 행동만큼 교묘한 것은 없다. 그 변신의 탈바꿈의 유연성은 따로 예를 찾아볼 수 없으며, 변신의 자유자재함은 곤충의 탈바꿈보다도 뛰어나고, 그 세련된 기교는 화학작용의 불가사의를 능가한다. 자기애의 밑바닥을 잰다는 것도, 그 심연의 어둠을 꿰뚫어본다는 것도,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자기애는 그 어둠 속의 가장 날카로운 눈에도 보이지 않게끔 숨어서 누구의 눈에 띄는 일도 없이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인간에 대한 잠언집. 563번)고 했다. 그렇다.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는, 비록 그 행동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헌신적이라 하더라도, 심지어 신앙고백으로 인해 순교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기애가 빠진 행동은 없다. 사람뿐 아니다. 모든 생명은 자기 생명에 집착한다. 개, 고양이, 사자, 호랑이, 모기, 거미는 말할 것도 없고 꽃과 나무도 자기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무릇 생명에 대한 집착은 생명에의 의지이며, 생명의 자기애는 생명의 본성이다.

폭력의 뿌리인 자기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명의 자기애가 단순하게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명의 자기애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은 너무 쉽게 왜곡되고, 도를 지나쳐 폭력으로 탈바꿈하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폭력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폭력의 근본 인자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라. 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공격하고 짓밟는 것일까? 왜 생명과 생명이 투쟁하며 폭력을 가하는 것일까? 바로 자기중심적으로 작용하는 왜곡된 자기애, 정도를 넘어선 지나친 자기애 때문이다. 만일 생명의 자기애를 넘어선다면 지구상의 모든 폭력은 사라질 것이다. 죽임의 고리도 끊어질 것이다. 그런데 자기애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이 땅의 폭력 또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자기애와 폭력이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애야말로 폭력성의 뿌리다. 모든 폭력은 자기애가 낳은 사생아요 자기애의 또 다른 얼굴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온갖 생명 중에서도 자기애가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폭력성으로 발전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도 그랬다. 대제사장들이 거짓 증인까지 내세우며 밤새 예수를 심문하고, 새벽이 오자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의논한 다음 예수를 결박하여 점령군을 통솔하고 유대사회의 법과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왜곡된 자기애 때문이었다. 그 때의 상황을 살펴보라.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주면서 고발한 혐의가 무엇이었나?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그 당시에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것은 로마의 황제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요 로마의 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매우 정치적이고 민감한 행동이었다. 로마 황제의 자존심과 권위를 깡그리 무시하는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건 몰라도 로마에 대한 정치적 도발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간교하게도 바로 그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사실 예수님의 행동은 조금만 살펴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비폭력적이었고 정치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근본적인 것이었다. 로마 항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러기 때문에 저들도 예수가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적인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예수를 제거해야만 기존 질서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고, 성전 체제를 고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성전 체제가 아니라 자기들의 체제, 자기들의 존립 근거를 잃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동원하는 뻔뻔함을 보여주었다.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고도의 사기 행각을 서슴지 않았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였다. 빌라도는 고소당해 끌려 온 예수를 보고 고소한 내용을 확인하듯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다. 빌라도나 성전당국자들이 생각하는 왕, 저들이 고소하는 정치적인 왕은 아니었으나 백성들을 섬기는 진정한 왕이셨다. 하여, 예수님은 당당하게 유대인의 왕임을 인정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생각지 않고 들리는 소리만 들은 대제사장들은 드디어 예수가 유대인의 왕임을 자백을 했다고, 자기들이 예수를 고소한 내용이 맞지 않느냐고 큰소리쳤다.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인이나 받은 듯이 의기양양해 하며 때를 만난 매미들처럼 떠들어댔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동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오직 침묵하실 뿐이었다. 빌라도는 의아했다. 너무 기이했다. 하여, 예수님에게 물었다. ‘저들이 이렇게 많은 것으로 당신을 고소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대답이 없소? 뭐라고 한 마디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오?’라고 다그치듯 물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때는 마침 유월절이었다. 유대인은 명절이 되면 백성이 요구하는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전례가 있었는데, 때마침 유월절인데다가 백성들이 전례대로 죄수 한 명을 석방해주기를 요청하자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줄 양으로 백성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사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예수의 정치적 혐의는 대제사장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뒤집어씌운 것일 뿐 반로마 대열의 정치적 혁명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15:10). 하여, 백성들이 원하면 예수를 석방할 요량이었다. 백성들도 예수를 석방해 주기를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회한 정치꾼이 다 된 대제사장들이 그 상황을 그냥 보아 넘길 리 없었다. 저들은 지체 없이 무리를 충동질하여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유인했다. 군중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자기들이 뜻을 관철시켜야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백성들이 놓아달라고 요청한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마가는 바라바에 대해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알 수는 없다. 어쨌든 사람을 죽인 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런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빌라도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여,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15:12)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저희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재차 확인하듯 또 물었다. “어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러자 그들은 더욱 큰소리를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쳤다. 마치 썩은 고기를 만난 들개들처럼 저들은 정신없이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살인자는 풀어주고 예수는 못 박으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군중이 어리석다 해도 그 정도를 분별할 수 없단 말인가? 그랬다. 저들은 이미 무지와 도취의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다. 더 이상 이성이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 저들을 설득할 수도, 저들 스스로를 반추할 여지도 없었다. 저들의 눈에는 오직 예수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예수를 향한 분노와 살의만이 저들의 황폐한 가슴을 펌프질할 뿐이었다. 빌라도 역시 눈곱만큼의 이성이 없지 않았지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아 군중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말았다. 어느 정도의 진실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자기에게 손해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예수를 넘겨 준 것이었다. 나는 빌라도의 이런 행동을 보면서 ‘빌라도야말로 참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을 깊이 들여다본 프랑스의 철학자 라 로슈푸코가 말했다. “자기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사람이 타인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갑자기 중풍병자가 되기도 한다.”(인간에 대한 잠언집. 510번). 정말 인간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로슈코푸가 말한 대로 자기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었다면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빌라도가 타인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중풍병자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빌라도는 군중을 통해 군중을 지배할 줄 아는 노련함이 있었다. 겉으로 보면 빌라도가 군중에게 무릎을 꿇은 형국이지만 실상은 군중에게 무릎 꿇은 것이 아니라 군중을 이용한 것이다. 빌라도는 무조건적인 무력 통치보다는 군중의 힘을 등에 업는 것이 군중을 다스리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 군중을 통해 군중을 다스릴 줄 알고 군중의 어리석음을 이용할 줄 알아야 군중을 제대로 지배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의 정치적 감각은 이미 터득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설사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군중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얻는 정치적 계산을 할 줄 알았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 방식이다. 자기애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의 참 모습이다. 인간의 크고 작은 행동을 깊이 들여다보면 진실로 ‘자기애의 욕망만큼 격렬한 것은 없고, 이것의 의도만큼 은밀한 것은 없으며, 이것의 행동만큼 교묘한 것은 없다.’는 로슈코프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수를 넘겨받은 군병들

  빌라도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은 로마 군병들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예수를 끌고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는 예수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며 갈대로 그의 머리를 쳤다. 또 침을 뱉고 꿇어 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골고다로 끌고 갔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영혼과 육신이 지쳐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기력을 끌어낼 수 없을 정도로 심히 지쳐있었다. 할 수 없이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져야 했다. 예수님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골고다까지 끌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다.

  십자가형은 그리 흔하게 사용되는 처형 방식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범죄자에게는 사용하지 않고 로마의 제국주의적 권위를 조직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용되었다. 그런데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형에서도 못 박기 전에 한 가지 행하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못 박기 전에 일종의 마취 효과가 있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준 것을 보면 예수님에게만 아니라 사형수들의 육체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최소한의 배려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고통을 감하거나 면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통을 감하거나 면하는 길을 찾는 것은 고통에 무릎 꿇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통을 이기는 길은 고통을 감하거나 면하는 길이 아니라 고통을 끌어안고 고통의 중심을 뚫고 가는 길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혼과 육신의 기력이 쇠잔한 중에도 구차하게 고통을 면할 길을 찾지 않았다. 극한의 고통 앞에서도 영혼의 힘을 잃지 않았다. 당당하게 고통을 이기는 길을 선택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함으로써 고통을 이겼고, 죽음을 당함으로써 죽음을 이겼다. 어둠에 짓이김을 당함으로써 어둠을 몰아냈다. 바로 이 길이 예수님이 가신 역설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었다. 누구도 가지 못한 그분만의 길이었다. 비록 그분이 죄인의 모습으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분은 죄인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다(사53:5).
  그러나 사람들은 이 놀라운 역설, 하늘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을 향해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고 희롱하는 만용을 부렸다. 본래 만용은 무지와 도취에서 나오는 법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 안에 있는 바보신은 도취와 무지의 젖을 먹고 자란다고 말했는데 진실로 그렇다. 무식한 놈이 용감한 법이다. 무지한 자는 쉽사리 도취되고, 도취된 자는 겁 없이 만용을 부리는 법이다. 역사를 일별해보아도 알 수 있다. 잔인한 유대인 학살, 보스니아의 치열한 내전, 세르비아의 인종청소 같은 일은 무지와 도취의 협력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남북 간의 전쟁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유신독재도 없었을 것이다. 돈의 한계를 알고 돈의 힘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을 죽이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다. 역사 속에 일어났던 수많은 비극은 한결같이 무지와 도취가 협동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지구상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무지와 도취가 부른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웃지 못 할 희극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왜곡된 율법, 어둠에 빠진 자기애의 도취가 빚어낸 비극적인 희극이었다.

무지와 도취에 빠지기 쉬운 신앙

  그런데 가슴이 섬뜩한 것은 신앙처럼 무지와 도취에 빠지기 쉬운 것도 없다는 점이다. 본래 신앙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어둠에 갇힌 이성을 깨우는 것이다. 무지를 밝히는 것이다. 죄악을 봄으로써 나를 보고, 나를 봄으로써 내 안의 무지를 보고, 무지를 봄으로써 도취의 수렁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어둠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는 것이다. 무지의 어둠에 도취되어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다(엡2:2-3). 하지만 신앙의 현실은 전혀 이렇지 못하다. 신앙에는 무지와 도취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기 때문에 신앙은 한 없이 왜곡되고 일탈해왔다. 신앙이 무지에서 해방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지를 조장하고 장려해왔다. 무지한 신앙을 순전한 신앙이라고, 무지에서 비롯된 도취를 신앙의 열심이라고 치켜세워왔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의 희생 위에 세워진 교회가 예수님을 희생시킨 자들의 행위를 똑같이 반복해왔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더니 영락없이 그 꼴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갔던 길을 반복하는 것일까? 교회가 자기애의 집착과 욕망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애(自己愛)의 집착만큼 뿌리가 깊고 집요한 것이 없고 또 자기애의 욕망만큼 격렬한 것이 없는데, 교회 역시 자기애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악행을 반복할 수박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과과거보다 더 큰 악을 행했다고 생각된다. 이제라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보아야 한다. 신앙처럼 무지와 도취에 빠지기 쉬운 것이 없다는 진실을. 그리스도인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신앙은 순식간에 어둠의 종노릇을 하게 될 것이며 지도자들의 교묘한 자기애의 술책에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것을. 심지어 율법으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까지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렇다. 신앙이 무지와 도취에 빠지면 세상에서 가장 악랄하고 예리한 칼이 된다. 역사가 그 진상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십자가는 무지와 도취에 빠진 신앙의 진면목을 극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진실로 인간의 수치요 신앙의 수치다. 하여, 나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감추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