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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시인 십자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가지 진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인간이 사악하다는 진실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진실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간의 부패함과 패역함을 고발하고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했고(렘17:9-10), 바울은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시기∙살의∙사기∙난폭∙비방∙거만∙우매∙무정이 가득하다고 했다(롬1:28-31).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했다(막7:16).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셔야 했고(창6:5-6), 물로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사실 성경에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갖가지 유형의 범죄가 총망라되어 나온다. 마치 인간 죄악의 진열장 같다. 그렇다. 성경의 증언대로 인간은 사악하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이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사랑하고 경배한다.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빛을 거부한다. 생명의 의지가 살림의 의지보다는 죽임의 의지로 나타날 때가 많고, 왜곡된 자기애로 전이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역사를 보라. 시작부터 형이 동생을 죽이는 죽임의 역사였다. 종내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어둠의 역사였다. 끝없이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인종살상은 인간의 사악함을 대변하는 역사의 증거로서 부족함이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과 자기애가 부딪치면서 내는 관계의 파열음 때문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받는다. 정말이지 환멸과 절망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동반자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인간의 사악함과 우매함을 극적으로 폭로하는 사건이 어디 또 있을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를 보자. 그때 시각은 육시였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정오다. 그 시간은 태양이 그 빛을 잃기 전, 아니 가장 강렬하게 비출 시간이다. 그런데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줄기 빛도 찾을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온 땅을 뒤덮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 의의 빛이 죽고, 참 생명을 위해 참 생명이 죽는 그 시간, 어둠이 빛을 삼키고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그 시간은 아마 창조 이래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땅위의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방식이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실 때 어떻게 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빛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애굽 온 땅에는 흑암이 임하게 하셨다(출10:21-23). 선지자들이 심판의 날을 묘사할 때도 흑암을 사용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피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습1:15-16)라고 했고, 아모스 선지자는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며,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암8:9)라고 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임한 어둠은 물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문학적 표현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암튼, 마가는 온 땅에 임한 어둠을 통해 말한다. 하나님은 지금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계시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성전당국자들이나 로마의 군병들뿐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계시다고. 그리고 빛을 처형한 세상의 실상은 바로 어둠이라고. 유일한 빛을 제거했으니 더 이상 빛은 없다고. 그렇다.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사악한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깊은 어둠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세상임을 보여주는 처연한 계시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 사랑도 계시한다. 하나님은 의이시며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둘 중 어느 것도 폐기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요 존재의 바탕이다. 그런데 의와 사랑, 거룩과 사랑은 내적 갈등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이율배반적이다.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내적 갈등을 겪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둘 다를 만족시키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생각해보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가 공존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은 존재적으로 의이시고 거룩이시기 때문에 죄와는 공존할 수 없는 분이시다. 죄를 묵과할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하나님은 죄의 결과는 정녕 죽는 것이라고 말씀했다(창2:17).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넘어서는 분이지만 말씀을 폐기하는 분은 아니시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을 스스로 뒤집을 수도 없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한 폐기처분할 수 없는 진실이다. 진실로 그렇다. 죄는 심판받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 되었다. 하는 짓마다 죄 아닌 게 없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이미 죽음을 살고 있다. 자,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은 의와 거룩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이신데. 죄인을 심판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동시에 죄인을 사랑하시는데. 그것도 의와 사랑, 거룩과 사랑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분이 아니라 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분이신데. 그렇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아파하신다. 당신께서 만드신 세계를 보시며 눈물지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지혜의 왕이시다. 그분은 지혜의 왕답게 당신의 와와 거룩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죄인을 사랑하는 길을 여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와와 거룩을 손상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만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죄를 아들에게 물어 심판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아담과의 계약에 세상의 운명이 포함되었듯이 아들과의 계약에 세상의 운명을 담은 것이다. 또 아담과의 계약이 하나의 행위, 즉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행위 규정에 근거했듯이 아들과의 계약은 언약의 피, 즉 죽음을 통해 죄의 심판을 받는 순종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다(롬5:12-19).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빛나는 법. 인간의 사악함과 마음의 어두움이 용암처럼 분출된 추악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핏빛으로 물들어 어둠을 밝혔다. 생명이요 진리인 아들을 죽이는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자기 아들을 죽이는 이 역설, 하나님만큼 인간의 사악함과 부패함을 뼛속까지 들여다보신 분이 없고, 하나님만큼 인간의 어리석음과 목이 곧음에 넌더리를 내야 할 분도 없는데 목이 곧은 인간을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신다는 이 역설, 결코 포기하지 않고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이 역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과 사랑의 정수를 드러내셨다. 그렇다. 이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이다. 세상에는 없는 사랑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꿈일 뿐 현실이 될 수 없는 사랑이다.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요, 특히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도 십자가보다 더 완전하게 사랑을 계시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은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다. 결코 사랑을 포기할 수 없어서 선택한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판이요 최후의 행동이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사악함과 깊은 어둠이 오히려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만족시키면서도 사랑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지혜에 감동하여 고백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하나의 사건 속에서 완전무결한 방식으로 자신의 거룩과 사랑을 동시에 알려주신 사건이라고,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 그의 거룩과 그의 사랑이 똑같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하신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로마의 이름 없는 백부장의 이야기를 보자. 예수님이 온갖 비난과 조롱과 고통을 참아가며 십자가에서 죽는 과정을 지켜본 백부장은 말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이 사람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이요 유일한 사람이다. 더욱이 로마의 백부장이 이렇게 외쳤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로마의 제국신학에 따르면 황제는 신의 아들이요 지상에 나타난 신의 능력과 의지 그 자체였다. 로마의 평화는 신이 내린 평화요, 로마의 통치는 신의 통치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로마 황제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 제국에 의해 처형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건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은 결국 로마의 통치를 비웃는 것이요, 로마 황제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백부장이 말을 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왕 -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쳤는데 엉뚱하게도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다. 예수님이 역설적인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계시되었기에 누구도 그 계시를 읽지 못했는데 오직 한 사람 - 이름 없는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의 존재의 비밀을 읽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다면적 계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축약한 최고의 계시였다. 십자가의 계시가 없으면 다른 계시는 빛을 잃게 되는, 모든 계시의 출발이요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계시중의 계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죽음, 계시적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의 죽음을 조롱하고 비방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까지도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성경의 중심이요, 신앙의 중심이며,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뒤늦게 깨닫고 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전2:2)고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거치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다(고전1:18, 23-24).
  그렇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계시중의 계시이다. 물론 십자가 외에도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다 부분적 계시요 가려진 계시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오직 십자가만이 가장 완전한 계시이다. 하나님의 사랑, 의, 거룩, 그리고 인간의 사악함과 죄에 대한 심판, 또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 보여준 최고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읽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다

   예수님은 진실로 죽음의 실체를 알았기에 고통스러워했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죽음을 선택하는 자기희생을 했다.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생명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내주었다. 어떠한 저항도 없이 십자가에 몸을 맡겼다. 아니, 영혼까지 맡겼다. 그리고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다시 한 번 놀라운 일, 즉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니, 그깟 일이 사건이라고? 그렇다. 사건도 보통 사건이 아니라 대사건이다. 겉보기에는 사건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미미한 일로 보이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인류 역사의 흐름과 운명을 바꾸는 경천동지(警天動地)할 내용이 들어있는 지상 최대의 사건이다. 또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의 죽음인지, 어떤 축복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 담긴 사건이기도 하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우선 성전체제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했다.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성전 체제가 돌아갔다. 물론 성전 체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성전의 제사도 하나님이 명하여 세우신 것이고, 휘장도 하나님이 치신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즉사하는 걸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 죽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하나님이 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히9:12,15).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제사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히10:12,18). 또 예수님께서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10:19). 그러니 더 이상 무슨 성전이 필요하며 제사장이 필요하며 제사가 필요하며 휘장이 필요하겠는가. 하여,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한 것이고,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아버지께서 친히 휘장을 찢으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제사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 제사장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 돌로 지은 성전에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린 것이다.
  또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는 걸 의미한다. 그동안은 유대인과 이방인,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세대와 세대, 사람과 사람,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담이 가로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단절의 담을 헐어버렸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기만 하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그렇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위대한 선언이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없는 외침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성취되었다는 놀라운 선포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