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행복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생명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생명입니다.
실바람에도 흔들리는 들꽃, 강물을 거슬러 힘차게 몸을 놀리는 송사리,
꽃길 여행에 분주한 꿀벌과 나비, 중력을 비웃듯 허공을 가볍게 가르는 종달새,
수천수만 마리가 휘몰아치듯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는 철새들,
뜨거운 백사장에서 부화되어 나오자말자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거북이,
육중한 몸을 날렵하게 움직이는 고래, 엄마와 볼을 비비며 까르르 웃는 아기,
엄마 닭을 졸졸 따라다니는 노란 병아리,
이 모두가 아름다운 건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삶이고, 삶은 살림이며, 살림은 또다시 생명을 낳습니다.
생명은 살림입니다. 그런 고로
내 삶을 아름답고 온전하게 가꾸는 것도 생명,
네 삶을 아름답고 온전하게 북돋아주는 것도 생명,
진심을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생명,
떡 한 조각 나누는 것도 생명,
글 한 구절을 읽어주는 것도 생명,
미소 머금은 눈빛을 건네는 것도 생명,
넘어졌다 일어서는 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는 것도 생명,
무릇 소통하는 것은 다 생명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생명이 생명을 만나고, 생명이 생명을 끌어안을 때 행복의 꽃은 피어납니다.
생명의 노래, 생명의 기운, 생명의 축제가 곧 행복입니다.

생명은 살림살이를 하라고 주어진 창조주의 기운입니다.
그러므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 아니면 삶이 아닙니다.
살림살이를 하지 못하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뭇 생명이 살림살이 대신 죽임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겠다고 너를 죽입니다.
더 많은 걸 쌓겠다고 철새, 종달새, 꿀벌과 나비, 거북이, 송사리, 고래, 병아리, 들꽃을 죽입니다. 허공을 죽이고, 강을 죽이고, 산을 죽이고, 지구를 죽입니다.
죽음이 죽임의 행진곡을 부르며 역사 속을 걸어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죽임살이를 하면서도 큰소리칩니다.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입니다. 거짓입니다. 뻔뻔함입니다. 서로가 속고 속이는 어리석은 장난입니다.
생명은 죽임살이를 할 줄 모릅니다. 아니, 죽임살이를 할 줄 몰라야 참 생명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임살이를 하는 생명이 어디 있나요?
그건 생명을 모독하는 것 아니겠어요? 생명의 주를 모독하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이란 말 자체도 ‘삶을 사는 존재’란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죽임살이를 하는 건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된다’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이 사람은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사람’이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죽임살이에서 살림살이로 대전환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신 걸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사람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존재로 보기보다는 죽임살이에서 살림살이로 대전환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사람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죽임살이에서 살림살이로 대전환을 해야만 비로소 사람 - 삶을 사는 존재 - 이 되는 존재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살림살이가 구원입니다.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 즉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죽임살이를 청산하고 살림살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살림살이가 삶이고, 삶이 생명이며, 삶을 사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살림살이를 할 때 마음과 영혼 깊이에서 참 행복이 우러나옵니다.
살림살이를 할 때 구원의 기쁨이 샘솟습니다.
만일 죽임살이를 하면서 행복하다면 그 행복은 거짓 행복이거나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정신 이상자의 행복일 것입니다.
행복이 뭔지 모르는 눈먼자의 걸레 같은 행복일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의 노래지 죽음의 노래는 아닙니다.

예수는 참 생명이었습니다.
참 생명을 살았기에 참 사람이었습니다.
참 사람이었기에 참 행복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