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행복의 味學(1)

조선시대 중기 최고의 독서가였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에는 이런 글이 나옵니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이덕무는 한 사람의 지기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한 소중한 일인가를 최고의 아포리즘으로 표현했습니다.
한 사람의 지기를 위해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오색실로 친구의 얼굴을 수놓겠다는 이덕무의 마음을 읽으며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아리한 통증이 심장을 찔렀습니다. 한 사람의 지기를 군왕을 맞듯이 맞이하고 싶어 하는 이덕무의 마음이 너무도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여일하게 벗을 대하는 그는 분명히 그지없이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덕무의 마음이 한없이 그립고 부러웠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덕무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속도에 휘둘려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속도를 다투는 시대라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속도감이 있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더 빨리 만나고 헤어집니다.
다들 뭐가 그리도 바쁜지 만남을 해치우고 있습니다.
하여, 우리의 만남엔 행복이 머물지 못합니다. 행복이 채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전에 만남이 끝나버리는데 어떻게 행복이 머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경제 발전과 기술의 발달로 인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깊이 헤아려보면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머묾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머묾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말이면 고속도로마다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차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세요. 낮이면 집집마다 텅 비어 있지 않습니까. 세 살 어린이부터 팔십 세 노인까지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의 생활을 돌아보면 끝없는 이동의 연속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회 구조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머묾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묾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끝없이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 우리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17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살았던 파스칼은 “인간의 온갖 불행은 단 하나의 사실에, 곧 한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유일한 행복은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전환시키는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이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어떤 관심사,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즐겁고 새로운 정열, 도박, 사냥, 흥미를 끄는 연극, 소위 심심풀이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그처럼 소란과 법석을 즐긴다. 이런 이유로 감옥살이는 참으로 끔찍한 형벌이며, 이런 이류로 즐거운 고독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사람은 머묾을 견디지 못하기 끝없이 심심풀이를 찾아 이동하는 것이고, 심심풀이를 통해 행복의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장맛은 오랜 시간을 숙성시켜야 제 맛이 우러납니다. 맥주나 포도주도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깊은 맛이 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도 제 맛이 나려면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야 합니다.
인스턴트로는 혀를 자극할 수 있어도 깊은 맛을 낼 수 없듯이 행복도 짧은 시간에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이 행복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행복은 오랜 시간 자신을 변화시키는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한 삶의 미학(味學)입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속도에서 나오지만 가슴 가득 밀려오는 행복감은 깊이와 머묾에서 나옵니다. 깊이와 머묾의 미학(味學), 숙성의 미학(味學)이 곧 행복의 미학(味學)입니다.

  창조자께서 육 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칠 일째 안식하신 것도 쉼과 머묾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조하는 작업도 행복이었지만 쉼과 머묾이 없다면 그 행복은 결코 지속될 수 없기에 하나님 자신이 쉼과 머묾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창조 기사에서 발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실은, 하나님께서 작업하는 육일과 안식하는 하루의 조화 속에 행복의 비밀 코드를 넣어두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의 삶이 창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첫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굉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안식과 머묾이야말로 삶의 토대요 삶의 출발점이라는 걸 말없이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는 안식을 향하여 있고, 안식은 창조를 향하여 있습니다. 안식과 머묾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의 원천이며, 창조의 출발이고, 창조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식과 머묾을 잃어버렸습니다. 속도가 안식과 머묾을 짓밟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삶을 잃었고, 행복을 잃었습니다. 삶은 생활이 되었고, 행복은 한낱 꿈이 되었습니다.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18세기의 이덕무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덕무가 지닌 마음만은 부여잡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업하는 육일과 안식하는 하루의 조화 속에 넣어 둔 행복의 비밀 코드를 잊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복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비밀 코드를 망각한 채 욕망에 이끌려 속도에 희생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