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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이 그치지 않았던 혼돈과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온갖 악덕과 권모술수가 판치고, 오늘의 권력자가 언제 역적몰이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난세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공자는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인(仁)과 도덕(道德)에 기초한 덕치를 주장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55세부터 68세까지 세상을 주유했습니다.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1년 안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보겠다. 나아가 3년 뒤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길 것이다.”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공자의 정치적 이상을 이해하고 함께 실현해나갈 군주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접고 69세에 실의에 찬 귀향을 해야 했습니다. 공자는 그때의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불우한 것은 하늘의 뜻일 것이다. 허나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밑으로는 인간사회에 대한 공부를 하고, 위로는 천명을 알았을 뿐이다. 이런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해가 됩니다.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무려 14년 동안을 돌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자기를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삶은 실패한 것일까요? 불행한 삶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공자의 진짜 삶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공자가 고향에 돌아와 한 일은 교육과 저술이었습니다. 「서경」과 「시경」을 편집하였고, 노나라 역사를 정리한 「춘추」를 저술했습니다. 그것은 유교의 오경(五經) 중 삼경에 해당합니다. 「논어」는 四書 중 한 권으로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정리해 묶은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는 저술과 교육을 통해 유교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또「사기」의 ‘공자 세가’에 의하면 제자가 무려 3천명에 이르렀다고 하고,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공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7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공자는 죽는 날까지 제자들과 깊은 만남을 가졌고, 그 제자들에 의해 공자의 가르침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자가 공자 된 것은 귀향 이후에 한 일을 통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했습니다. 지나치리만큼 사람과 삶에 집중했습니다. 사람의 도리(禮)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노자의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노인들은 나를 대할 때 마음을 놓고, 친구들은 나를 신뢰하고, 젊은이들은 친밀감을 갖고 나를 따르도록 하는 게 내 소망이다.”고 했을 만큼 사람에게 소탈했습니다. 사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녕 행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볼까요?
갈릴리의 예수님은 민중의 아픔을 치유하고, 무거운 짐을 감싸 안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죄인을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셨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깨우치셨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동고동락하기를 3년 가까이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데 집중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갖 멸시와 능욕을 당하며 무참히 죽어야 했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은 스승을 배신했고, 나머지 제자들까지도 예수의 죽음을 외면하고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파했던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들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어떤 것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거부당했고, 보기에도 처연한 죽음을 홀로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실패한 것일까요? 불행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백한 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처절하게 고통당하고 멸시받았지만 최고로 행복한 자였습니다.
왜일까요? 온 세상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버림을 받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하나님 아버지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버림받기까지 순종하신 그의 순종을 기쁘게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으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결국은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아버지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온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괘념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께 인정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면 충분히 모든 것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이목을 끌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그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드러내기는커녕 드러내지 못하도록 경계하기에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의 자리로 홀로 걸어갔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순종한 죽음, 선택한 죽음을 죽었습니다.
공자가 ‘자기를 알아줄 것은 하늘밖에 없을 것이다’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품에 안으면서도 인류를 대상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했으며, 소수의 제자들에게 집중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삶의 깊이를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이 알아주는 것, 진리와 하나 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에 집중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있었습니다. 참된 행복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행복은 많은 성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소유의 많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언제든지 삶의 깊이에서 나옵니다.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을 생각해보세요. 수많은 펜들에 둘러싸여 가는 곳곳마다 박수갈채를 받고, 다들 탐욕의 눈들을 번득이며 부러워하고,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살하는 것일까요?
그 많은 박수와 재물이 그들의 버팀목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적인 만남이 한 줌의 위로나 행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스타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인기요 바람 같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인기인데, 그런 인기에 연연해서야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어떤 업적을 쌓았든지 대중을 의식하고 대중과 타협하는 한 행복하기는 어렵습니다. 행복은 언제든지 삶의 깊이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샘이 얕으면 가득 찼다가도 금방 말라버리지만 샘이 깊으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것 같이 행복도 그러합니다. 행복의 샘이 마르지 않으려 하면 삶의 깊이를 파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행복의 생수는 삶의 깊이에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행복의 생수를 마시려면 삶의 깊이의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