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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외부적 조건이 완벽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깨달음에서 옵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 현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볼 수 있을 때 행복은 살며시 문을 엽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볼 때, 눈앞의 사물을 스치듯 보지 않고 깊이 응시할 때, 매순간이 새로운 선물임을 알 때, 행복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가 행복에 눈을 뜬 것도 아픔을 통해서였습니다.
건강할 때 보지 못했던 행복을 건강을 잃고 나서야 보았습니다.

간경화로 인해 식도 정맥이 터지면 속이 뒤틀리는 고통과 매스꺼움에 순간도 견디기 힘듭니다. 급히 응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달려가면 제일 먼저 고무호스를 위장에 넣어 위 청소를 하고, 흐르는 피를 멎게 하는 시술을 합니다.
손가락 두 개보다 더 굵은 관을 목에 삽입하고 시술하는 내내 몸은 몸이 아닙니다.
의사 앞에 널브러져 있는 몸뚱이일 뿐입니다.
시술을 하고 나서도 빠르면 3-4일, 아니면 1주일 정도 금식을 합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서도 안 됩니다.
또다시 정맥이 터지면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안정, 또 안정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병상에서 보내다가 병원 문을 나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은 더 이상 잿빛 세상이 아닙니다. 너무 찬란합니다. 눈부십니다.
정말 뭐라 형언키 어려울 만큼 햇빛 가득한 세상은 찬란함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그렇게 힘차고 보기 좋을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속에서 생명이 약동하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너무 정겨워 눈길을 주게 됩니다. 자동차 경적 소리조차 반갑고 경쾌합니다.
또다시 이런 세상에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물론 병원 문을 나서고부터는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이상 짜증나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또다시 상황 앞에서 염려합니다.
짜증나기도 합니다.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없는 부자유함 때문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간일 뿐입니다. 결코 염려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잿빛 세상에 오래 잠기지도 않습니다. 재빨리 염려를 놓아버립니다.
잿빛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고 여전히 찬란한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근심되는 일도 많고, 한없이 유약한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은총보다 더 큰 진실은 없다는 것, 잿빛 세상 속에도 여전히 찬란한 세상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히 짜증을 거두어 냅니다.
잠간의 현상이 아니라 현상 너머의 더 큰 진실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행복을 맛봅니다.

바울 선생도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
시편 기자도 고백했지요.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71).
그래요. 고난이 고난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유익일 수 있겠어요?
약함이 약함이기만 하다면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어요?
약함이 강함일 수 있는 것이나 고난을 통해 주의 율례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약함과 고난을 통해 은총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진실을 보는 눈을 뜨기 때문 아니겠어요? 그리고 눈을 뜨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요.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깨달음에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은 강할 때보다는 약할 때 깨달음의 눈을 얻습니다.
잃어보아야 잃은 것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공기를 잃어보아야 공기의 가치에 눈을 뜨고,
물을 잃어보아야 물의 가치에 눈을 뜨고,
건강을 잃어보아야 건강의 가치에 눈을 뜨고,
죽음에 다가가 보아야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뜹니다.
고난을 겪어보아야 자신의 약함에 눈을 뜨고,
자신의 약함에 눈을 떠야 은총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보이지 않던 진실에 눈을 뜹니다.
행복은 언제든지 강함과 성공의 문을 통해 들어오기보다는
약함과 실패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