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언어는 단연 ‘돈’과 ‘성공’입니다. 성공한 사람이 이 시대의 주역이고 영웅이고 스타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것은 돈과 성공으로 통합니다. 돈과 성공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행복 공식은 매우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돈=행복, 성공=행복입니다. 인생은 성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성공하면 인생을 훌륭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삶의 의미니 가치니 분배정의니 생태계 보호니 하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성공을 하는 경우가 드문데 비해, 성공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고 그 공식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은 결국 돈도 벌고 사회적인 성공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하나의 목표, 성공하겠다는 하나의 목표만을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들이 승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공과 행복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일반적으로 성공과 행복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세 가지 정도의 시선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성공을 통해 행복을 얻겠다는 것이 첫 번째 시선이고, 성공과 행복을 동시에 붙잡겠다는 것이 두 번째 시선이며, 행복은 성공을 초월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세 번째 시선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시선은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공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시각을 대변합니다. 보통의 삶, 불만족한 삶에서 빠져나와 성공을 이루면 그 성공을 통해서 원하는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보는 거지요. 성공을 행복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시선은 행복과 성공을 다 잡아야 한다는 시각을 대변합니다. 행복에는 성공의 요소도 들어있고, 또 성공에도 행복의 요소가 들어있지만, 행복과 성공은 기본적으로 별개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하여, 성공을 통해서 행복을 얻겠다기보다는 행복은 행복대로, 성공은 성공대로 추구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에는 행복도 필요하지만 성공도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셋째 시선은 행복이란 성공을 초월해 있다는 시각을 대변합니다. 성공이 좋은 것이긴 하나 행복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공보다는 행복이 훨씬 중요하고 값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성공보다는 행복을 얻는데 삶의 초점과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성공보다는 행복에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행복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과는 퍽 대조적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어느 하나의 시선만을 택해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안에는 위 세 가지 시선이 뒤섞여 있습니다. 성공보다는 행복이 중요하고 우선되는 가치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성공도 행복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뒤섞여 있습니다.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과 성공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뒤섞여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시선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생각과 관점들이 하나의 삶 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상적인 생각과 현실적인 생각 사이에, 내면의 생각과 실제 생활 사이에 섞임과 괴리가 혼재해 있습니다. 하여, 스스로의 삶에 대해 모순을 느낍니다. 생활은 열심이지만 내적인 평화가 없습니다.

   

성공과 행복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위 세 가지 시선으로는 성공과 행복의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성공과 행복의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네 번째 시선이 필요합니다. 행복이란 보통의 삶, 불만족스러운 현재의 삶 가운데 이미 존재한다는 시각입니다. 행복이란 성공 너머에 있는 것도, 성공의 관문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지요. 행복은 현재의 불완전한 삶 속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삶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눈물이 있고, 가난이 있고, 아픔이 있고, 불의와 상처가 있는 현재의 구멍 뚫린 삶 속에 있습니다. 성공뿐 아니라 실패에도 행복이 있고, 부유함뿐 아니라 가난에도 행복이 있으며, 건강뿐 아니라 병마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기뻐 노래할 때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눈물 속에서 피어나는 행복의 꽃이 더 아름답고 향기로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행복은 성공으로 치장된 화려한 삶이 아니라 일상의 삶 자체에서 피어나는 삶의 꽃이니까요.

 

‘삶’과 ‘삶의 상황’은 다르다

 

아주 소박하게 이야기해봅시다.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족과 나의 안정된 삶과 자녀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지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입니다. 성공하면 돈이 따라오고, 꿈꾸었던 생활을 맘껏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공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릅니다. 주변을 보세요. 대부분 아름답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서 어렵사리 부자도 되고 성공도 합니다만, 처음에 의도한대로 아름답고 인간적인 삶으로 나아가던가요? 그런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성공은 삶으로부터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성공을 향해 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삶을 짓밟게 됩니다. 아름다운 삶을 위해 성공을 꿈꾸었는데, 성공을 향해 달리다 보면 삶은 저만치 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사실 돈, 권력, 성공, 지식, 신앙, 기술, 문학, 예술, 기업, 이 모든 것들은 삶을 위해 동원되어야 마땅합니다. 신앙도 삶을 위해 주어진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삶이 돈을 위해 동원되고, 삶이 성공을 위해 동원되고, 삶이 기업을 위해 동원되고, 삶이 신앙을 위해 동원되고 있습니다.

본래 삶이라는 것은 돈 벌고 성공한다고 해서 삶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이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아니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오묘한 그 무엇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서 ‘삶의 상황’과 ‘삶’을 구분했습니다. ‘삶의 상황’은 우리의 환경과 경험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삶’은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삶’은 근원적인 것이고,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개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삶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삶의 상황’을 개선하는 걸 ‘삶’의 개선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대용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삶이란 본래 사람의 손 안에 들어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삶이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요, 우주 전체가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 구성된 ‘그 무엇’입니다. 삶이란 모든 생명이 자기 존재의 본성과 모든 존재의 본성에 일치하게 될 때 경험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호응하고,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반응할 때 피어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삶이 진정한 삶이 되려면 반드시 내 삶이 거대한 삶 속으로, 거대한 삶이 내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야만 합니다. 내 생활의 리듬이 우주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거대한 삶과 내 삶이 조우할 때, 바로 거기에서 행복의 꽃은 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이 곧 삶인 것처럼, 돈을 벌고 많은 것을 성취하는 것이 곧 삶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삶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곧 삶의 개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돈과 성공 때문에 삶이 소외되고 있는데, 우리는 돈과 성공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그 위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다들 성공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이 시대의 부모와 지도자들도 하나같이 말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큰 꿈을 가져야 한다고. 성공할 때까지는 좌고우면(左顧右眄)해서는 안 된다고. 또한 시대가 요구합니다. 성공으로 너의 능력을 보여 달라고. 성공이라는 실적을 내놓으라고. 이처럼 성공에 몰입하다보니 삶을 위해 요구되었던 성공이 성공 때문에 삶이 동원되고, 성공 때문에 삶이 소외당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수 조영남씨가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큰 꿈을 가지라’고 외치는 시대에 ‘너무 큰 꿈은 인생을 재미없게 만든다’는 말은 시대의 맹점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생을 깊이 통찰한데서 나오는 삶의 진실이 배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을 펼쳐가기보다는 인생을 삼켜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큰 꿈은 인생의 다양한 멋과 깊은 맛을 즐길 여유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너무 큰 꿈은 꿈의 성취라는 결과에만 집착하게 하기 때문에 인생길을 여행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수많은 축복들을 놓치게 합니다.

물론 꿈은 필요합니다. 꿈은 우리가 어려울 때 좌절의 늪에서 허덕이지 않도록 북돋아줍니다. 꿈은 긍정의 힘이 되어 인생의 어려움을 뚫고 나가게 합니다. 꿈은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목표 지점을 잃지 않게 해줍니다. 꿈이 있는 사람만이 나래를 펴고 인생의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꿈은 인생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너무 큰 꿈을 꾸지 않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용품, 재산, 의식, 선행, 지식, 그리고 사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소유나 존재냐)고 말했습니다. 꿈도 예외가 아닙니다. 꿈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쳐 집착이 되면, 그때부터 꿈은 인생의 걸림돌이 됩니다. 참 묘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역설이고 인생의 묘미이며 인생의 짓궂음입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산을 쉽게 정복하지 못하는 것도 인생이라는 것이 그토록 오묘하고 짓궂기 때문일 겁니다.

 

행복은 현재의 삶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돈과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에 보면 그가 작가로서 최고의 성공을 구가하던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인생의 깊은 허무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찬사와 귀족들과의 향연이 그를 행복에 젖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허무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반면에 그는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서 진정한 평화를 보았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경건함을 보았습니다. 귀족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행복의 정경을 민중들의 평범한 삶 속에서 읽었습니다. 하여, 톨스토이는 날마다 땅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러 나가는 것을 즐겼고, 나중에는 가난한 농부들에게 자기 땅과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톨스토이가 발견한 대로 행복은 민중들의 삶속에 있고, 행복이라는 단어도 민중의 언어입니다. ‘성공’이 승리자의 언어인 반면 ‘행복’은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입니다.

만일 행복이 성공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복은 성공한 사람에게만 배당되는 특별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복을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행복을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도 행복이 민중의 삶에 있지 않고 몇 몇 승리자의 성공한 삶에만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고 있습니다.

 

성공의 본질과 한계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그림자가 따르게 마련입니다만 성공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결함입니다. 성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순수함을 파괴합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들을 때는 귀가 솔깃하지만 듣고 나면 마음이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나도 저렇게 성공해야지’ 하는 경쟁심이 발동하지 않습니까? ‘그래 너 잘났다’는 식의 질투심이 발동해 성공한 사람을 흘겨보게 되지 않습니까? 또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 보여 속상하지 않습니까?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왠지 비교의식이 발동하고, 듣고 나면 기분이 우울하고,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습니까? 예쁘게 생긴 여자가 화려한 옷을 걸치고 지나갈 때 다른 여자들의 눈을 살펴보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외면하거나 눈을 치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성공이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시기심을 자극합니다.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반면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기분이 어떻던가요? 마음이 흐뭇하고 감동이 되지 않습니까? ‘나에게도 행복의 요소가 많이 있구나!’ 하는 걸 발견하곤 절로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성공한 사람의 화려한 성공담을 들을 때 생기는 경쟁심, 시기심, 증오심이 생기지 않지요? 행복 이야기는 또 다른 행복을 낳습니다. 삶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줍니다. 힘들고 고달프지만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공동체성을 살려냅니다.

물론 화려한 성공담이 꼭 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분발심이 생겨 새롭게 도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10대인 박인비 양이 여자 골프 대회가운데 가장 역사가 길고 권위 있는 US여자오픈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했습니다. 박인비 양이 골프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1998년 7월 7일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날은 박세리 선수가 US여자 오픈대회에서 연장과 재연장을 거듭하는 가운데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가는 맨발의 투혼으로 제니 추아시리폰을 꺾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US오픈 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은빛 우승 트로피를 안아 온 국민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었던 날입니다. 박인비 양은 아버지와 함께 그 장면을 보다가 마음에 감동을 받고 다음날부터 골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꼭 10년 만에 박세리가 우승했던 그 대회에서 박세리보다 더 어린 나이에 메이저 퀸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경험이 자극이 되어 대통령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마 누군가는 이번에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으로 우주정거장에 갖다 온 이소연 씨를 보고 우주인의 꿈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또 다른 성공을 부르는 메아리가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공이 삶의 원형인 공동체성을 살려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게 아니라고, 그건 어디까지나 듣는 사람의 마음이 삐뚤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자들의 마음만 탓할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대적 실패감과 경쟁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성공하면 나머지 99명은 실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성공의 본질이요 한계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해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성공의 역설

 

정신과 의사인 숀 크리스토퍼 쉐어는 20년 넘게 임상정신의학에 종사하면서 ‘사람의 행복이나 불행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한 가지 진실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고통과 불행은 대부분 욕망, 추구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 때문에,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목표를 추구하는 일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혹은 지나치게 많은 목표를 선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고 불행하다는 것입니다.(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그는 그에게 큰 가르침을 준 한 대학생, 키는 약간 작지만 잘 생긴 티모시라는 학생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티모시는 악수하는 손길도 단단했고 눈빛도 맑았으며 솔직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을 용기를 냈다는 점에서 상당한 정신력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유능한 학생으로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정작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아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시작한지 몇 달 뒤, 티모시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진료실에 들어오더니 쉐어에게 말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답을 찾았어요.” 그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계속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게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건지 똑똑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는 연이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거 아세요?” “아니, 뭐 말인가?” “성공은 행복이 아니에요. 행복을 찾는 게 성공이지요. 온갖 것을 다 이루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그동안 나는 이것과 정반대였죠. 그래서 온갖 성공을 거두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거예요. 가만히 앉아서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생각해봐야겠어요. 그래서 그걸 내 인생의 목표로 삼을 거예요.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을 거예요. 이렇게 살면 아주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해요.”(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성공 이후에 당연히 따라오리라고 예상했던 행복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지금까지 들어왔던 인생의 법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성공을 쟁취하는 것보다 행복을 찾는 것이 진정으로 성공한 삶이라는 진실, 성공보다 더 값지고 필요한 것은 행복이라는 진실을 스스로 발견했습니다만, 이런 모순을 겪는 것은 티모시뿐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승리의 욕망에 붙들려 삽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구조가 무의미한 경쟁으로 우리를 몰아넣기 때문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경쟁에 뛰어듭니다. 다른 건 다 뒤로 재껴 놓고 일단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고, 승리가 지상 과제가 되어버린 이상한 삶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일단 내가 차지할 수 있는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내가 서야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는데(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함), 그 자리에 앉아있어도 행복하지가 않은 겁니다. 사회적인 성취를 하기는 했는데 내면이 채워지지 않은 것 때문에 여전히 허전함과 공허함을 떨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

 

이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성공 주도적인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와인 감식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외인 감식가는 한 번에 잔을 비우는 법이 없습니다. 와인의 풍부한 맛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 향기를 맡고 맛을 보고 음미하면서 시간을 갖습니다. 코와 혀끝만 아니라 온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와인의 다양한 맛과 향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합니다. 인생의 맛과 향도 제대로 음미하려면 삶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한 번에 와인 잔을 비우는 사람처럼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인생이란 성공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소유의 배부름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인생은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고, 삶은 존재의 근원을 알고, 너와 나를 알고, 삶의 상황인 세상을 알고, 인생의 어떠함을 알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인생은 와인보다 그 맛과 향이 훨씬 다양하고 다채롭습니다. 미세한 차이를 다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습니다. 또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다름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정말 한없이 오묘하고 짓궂습니다.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와인 감식가보다 더 깊은 분별력과 음미하는 태도, 진중하고 그윽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급히 서두르며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으로는 인생의 미묘하고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일등 한 자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경기가 아니니까요. 인생은 함께 하는 놀이 같은 것이지 우승을 가리는 경기가 아니니까요. 소크라테스는 반추하지 않은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반추하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반추하지 않고 내달리는 인생에는 인생의 향기가 머물기 어렵습니다.

행복과 성공의 본질적인 차이는 이것입니다. 행복은 성공과 다르게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또 함께 가져도 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공은 절대 나누어 가질 수 없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또 행복은 성공과 다르게 경쟁심이나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하나님이 설계하신 사회는 성공 지향적인 사회가 아니라 행복 지향적인 사회임이 분명합니다. 행복 지향적인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성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성공이 나쁜 것이란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성공이 가져다주는 부정적 측면, 위험성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대면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삶을 소외시키고 삶과 분리된 성공일 가능성이 많으며, 삶을 소외시키고 무너뜨리는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관찰하기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보다 훨씬 멋져 보이고, 성공이 행복보다 더 찬란하고 고귀해 보이지만 한 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 즉 ‘사회적인 성공’과 ‘삶의 성공’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 ‘사회적인 성공’보다는 ‘삶의 성공’이 훨씬 값진 것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적인 성공’을 하지 못해도 인생을 살아낼 수 있지만, ‘삶의 성공’ 이 없으면 인생을 살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행복을 여는 열쇠이기보다는 오히려 행복을 죽이는 칼이요 무덤이기 쉽다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 때문에 행복의 기회를 놓치고 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참된 행복은 성공 안에 있지도 않고, 성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일상에 숨어 있습니다. 아픔과 눈물 속에도 행복이 깃들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웬 신부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성공적인 삶과 열매가 풍성한 삶 사이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성공은 힘과 통제력과 존경할 만한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그것이 발전되어 가도록 계속 통제력을 가지며, 그것을 양적으로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공에는 많은 보상과 때로는 명성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열매는 약함과 취약성으로부터 맺습니다. 그리고 모든 열매는 독특합니다. 어린 아기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 속에서 잉태된 열매이고, 공동체는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가운데 나타난 열매이며, 친밀함은 서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짐을 통해 자란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것은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열매 맺는 삶임을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십시오.”(영혼의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