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비유를 신앙적인 교훈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비유는 말 그대로 하나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사태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며,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나라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면 항상 “하나님 나라는 …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해석의 폭을 한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나라 비유를 신앙적인 교훈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읽는 것은 아주 잘못 읽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을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나라의 진짜 메시지가 아닙니다.

 

둘째, 비유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비유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다른 현상이나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자대로 해석했다가는 전혀 엉뚱한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적으로 읽는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자에 충실할 필요는 있지만, 문자에 매이는 것은 좋은 성경읽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하자 니고데모가 대뜸 물었습니다. “예수님, 사람이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난단 말입니까? 어머니 자궁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참 우스꽝스럽지요? 말은 제대로 들었는데, 말귀는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문자만 들었지 말 이상-문자 이상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만 더 이야기해볼까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어느 시인이 강원도 두메산골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서 첫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들에게 혹시 백일장에 나가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학생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어투로 시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여기는요, 백일장이 아니라 오일장이래요!(이외수의 ‘하악하악’에서)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소통 부재의 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나 강원도 두메산골의 학생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전혀 못 알아듣는 일이 많습니다.

밀과 가라지 비유도 그렇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밀과 가라지를 독립된 개체로 이해했습니다. 밀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라지는 사단의 종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설교자들은 그런 이해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씨 뿌려 놓은 교회 안에는 반드시 사단이 뿌린 가라지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 안에는 밀과 가라지가 있으니 잘 살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닙니다. 이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한 것이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신자도 있지만 가라지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밀과 가라지 비유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배경을 생각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밀농사 풍경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시아 통치 이해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본적인 주식은 빵이었습니다. 밀은 반드시 재배해야 하는 기본 곡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라지’라고 번역된 zizanion이라는 식물은 일반 잡초를 말하는 보통 명사가 아니라 독보리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독성을 가진 호밀과 식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입니다. 이 식물은 생장 초기의 생김새가 밀과 매우 흡사해서 이삭이 나오기 전까지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보통 봄에 잡초를 제거하는데, 그때는 밀과 흡사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삭이 나오면 비로소 가라지라는 걸 알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는 밀도 함께 뽑히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수확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가 키가 큰 밀을 먼저 수확하고, 가라지는 나중에 따로 잘라내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의 이런 밀농사 풍경을 그대로 비유로 차용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든 수치와 베고픔과 압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평화와 정의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내렸다.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포로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눅4:16-19)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더욱이 가는 곳곳마다 병자들이 낫고, 귀신이 나가고, 말 못하는 자가 말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은혜의 해가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니 메시아의 통치를 애타게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1945년에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기뻤을 것입니다. 물론 기쁨이 전부는 아니었겠지요. 그들은 기대에 부풀었을 겁니다. 상상을 했을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모든 수치는 사라질 것이라고. 배고픔과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평화와 정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그 나라는 정녕 빛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악과 어둠은 조금도 발붙일 수 없을 것이라고. 선과 악이 극명하게 나누일 것이라고. 정말 그런 환상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환상에 부풀어 있는 자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들에 나가보면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좋은 씨를 뿌린 밭에도 악한 원수가 뿌린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나라가 올곧고 선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진행될 하나님나라의 사태는 투명하지도 않고, 찬란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나누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그날까지는 불의와 어둠이 뒤섞인 채 전개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밀과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추수 때까지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보면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대뜸 주인에게 찾아가서는 “가라지를 뽑아버릴까요?”하고 여쭈었습니다. 이 말은 “뽑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적극적인 의견 개진입니다. 독보리를 뽑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 이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와 악에 대해 쉽게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특히 하나님나라에 열심이 있고,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들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그런데 밭의 주인(예수님)은 다릅니다. 가라지(독보리)를 당장 뽑아버리라고 할 것 같은데 뽑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합니다. 원수가 몰래 심은 것이니까 당연히 뽑아버리라고 할 것 같은데 뜻밖에도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 가라지를 뽑다가는 밀도 뽑힐 수 있으니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밀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니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왜 악한 원수가 몰래 뿌린 씨를 뽑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미 사단의 권세를 짓밟은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사단의 씨를 뽑지 않고 두시겠습니까? 하지만 밀을 보호하는 것이 가라지를 뽑아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기보다는 차라리 뽑지 말고 그냥 두라 한 것입니다. 정말 밀을 아끼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한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십시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는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교회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의해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는 일을 하지 않았지만, 4세기 초에 로마의 국교로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교회의 비위를 거스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해왔습니다. 교회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진리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처단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가두고, 화형에 처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5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일어난 마녀사냥 광풍으로 약 4만 여명이 희생되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구교간에 처절한 종교전쟁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를 가려내는 일에 열심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가 불거지면 대뜸 ‘당신 혹시 가라지 아니야?’, ‘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라지로군!’ 그러면서 밀과 가라지를 가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사로운 일에서도 나타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가라지라고 생각될만한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남편은 아내의 가라지를 뽑기 위해 행동에 나섭니다. 당신, 이거 가라지 아니냐고 비판하면서 빨리 그 나쁜 가라지를 뽑아내라고 큰 소리 칩니다. 스스로 못하겠으면 내가 뽑겠다며 달려들어 법석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는 아내대로 상처받고, 남편은 남편대로 상처받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가라지를 끝내 뽑아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 말씀대로 둘 다 죽습니다. 아내도 죽고 남편도 죽습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추수 때가 되기 전에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요. 정말 밀을 사랑하고 아낀다면 가라지를 그냥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로 태울 때가지 그냥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로 태우기 전에 사람이 나서서 뽑으면 깨끗하게 해결될 것 같지만 사실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녀를 죽였다고 해서 마녀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멀쩡한 사람만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는, 가라지를 뽑는 것은 허망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분명히 악한 원수 사단이 뿌린 씨앗입니다. 사람들이 잠을 잘 때에 몰래 뿌린 씨앗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참 은혜로운 해석을 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를 ‘영적으로 잠잘 때’라는 뜻으로 해석해서, 사단은 항상 잠자는 틈을 이용해 악한 씨를 뿌리니 사단이 악한 씨를 뿌리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깨어있으라고 설교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사단이 악한 씨를 뿌릴 수 없다고 설교합니다. 참 은혜롭지요? 하지만 은혜로운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중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눈에 띄게 활동하는 게 아니고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 있다 해도 사단이 악한 씨를 뿌리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가 없다는 사태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또 이 비유를 잘 살펴보면 주인의 태도가 매우 담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기색도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벌어진 양 호들갑을 떨지도 않습니다. 마치 충분하게 예상한 일인 듯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었을 뿐입니다. “내비 둬!” 그러고는 그만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이 말하기 전에 이미 가라지도 자라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올곧게 전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황하고 놀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저 담담하게 가라지가 곡식밭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했습니다. 곡식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는 사실을 부정해야 할 현상이나, 뽑아 없애야 할 현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가라지가 섞여 있는 현실을 하나님나라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구속사적 현실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다고 해서 가라지가 자라고 있는 구속사적 현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어둠과 악이 물러나면 좋지요. 어둠이 물러나면 더 이상 어둠의 종노릇하지 않아도 되지 얼마나 좋습니까. 악이 물러나면 선한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쟁이 없어지면 평화의 세상이 활짝 열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거짓이 사라지면 진리가 오롯이 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이 사라지면 선이 꽃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거짓이 사라지면 진리가 오롯이 설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거짓이 사라지고 진리만 있으면 사람에게 참 유익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잘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있기 때문에 평화를 갈망하고 꿈꾸고 있습니다. 거짓이 있기 때문에 정직이 선명하게 살아나고, 정직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고전10:12). 그래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넘어져야 일어서고, 넘어지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도 거짓이 있을 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거짓이 있을 때 썩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만 있으면 진리는 곧바로 넘어지고 썩습니다. 교회도 교회가 썩어문드러질 때 교회다운 교회가 일어섭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깊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씨를 뿌린 밭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만큼 찬란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이 땅에 도래했지만 아직은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고, 또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핵일까요? 지구 온난화일까요? 전쟁일까요? 아닙니다. 오류가 없는 완전한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 궁극적 진리를 보았다는 확신보다 더 무섭고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유대 랍비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을 들어봅시다. “자신의 지혜를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것이 투병하게 분명한 사람들, 신비라든가 불확실성 따위는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나는 몸이 떨린다.” 그렇습니다. 헤셸의 말대로 가장 처참한 전쟁은 언제나 종교 전쟁이었고, 가장 잔인한 죽임은 이단에 대한 처형이었습니다. 오류가 없는 궁극적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확신범들이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일들을 자행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신비와 불확실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악하고 비인간적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하나, 사람의 최대 약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음? 피조물이라는 것? 죄?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자기 확신에 잘 속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매우 이성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의외로 자기 확신에 잘 빠집니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만 해도, 그것이 마치 절대 법칙이라도 되는 양 대단한 확신을 갖는 게 사람입니다. 기도를 몇 번만 응답받아보세요. 그러면 곧바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사람이 그래요. 쉽게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고, 또 자기 확신에 잘 속습니다.

특히 선과 악을 안다는 확신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사람 속에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지 모르겠는데요, 사람들은 정말 순진할 정도로 선과 악을 안다는 확신에 붙잡혀 있습니다. 의와 불의,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확신에 붙잡혀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사단의 나라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아주 강합니다. 특히 영 분별력이 있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고 죄악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더 강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말합니다. 완전한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 불확실함을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나 신념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고.

하여,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나라에 속한 생명 운동과 하나님나라에 저항하는 사단의 운동을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성적 존재이고, 또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선악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판단할 능력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선악의 문제는 만물 위에서 만사를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지 만물 중에 하나이고, 만물 안에 있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선악이라는 게 본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절대 포착할 수 없습니다. 파스칼의 말을 들어봅시다. “주여, 당신을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고, 당신에게 죄를 짓는 일은 나쁘다는 것이 제가 아는 유일한 사실입니다. 그 밖에는 모든 일에 있어 무엇이 최선의 것이고 무엇이 최악의 것인지를 모릅니다. 저는 제게 유익한 것이 건강인지 질병인지, 부인지 빈곤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과 천사의 능력을 넘어서는 구분이며, 당신의 섭리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는 구분입니다.” 매우 정직한 고백입니다. 사람은 진실로 무엇이 나에게 최선이고 최악인지,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고 해로운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선악에 대한 판단이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유보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죄악을 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선악을 분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과 악을 혼동하지 않도록 시대를 살피고, 교회를 살피고,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롬12:2). 하지만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힘써야 하지만 판단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내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불투명한 하나님나라의 현실, 만족스럽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현실에 낙망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추수 때가 오면 가라지는 불태워 없어질 것이고, 모든 희미했던 것들은 사라질 것이고, 하나님나라가 선명하게 그 영광스러운 실체를 드러낼 것이니, 그때까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만족스럽지 않은 현실을 감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구속사적으로 믿음과 기다림의 시대입니다. 아직은 하나님나라가 불확실과 불투명 속에서 진행되고 있고, 의와 불의가 뒤섞인 혼돈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결과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속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믿음으로 깨어 있다 할지라도 불의와 거짓을 맞닥뜨리게 되어 있고, 어둠에 휩싸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여, 불의와 거짓을 만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고, 분노할 것도 없습니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면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멋지게 승리의 개가를 부르지 못하더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때로 승리하겠지만 때로 패배하더라도 자책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넘어뜨림으로써 일으켜 세우실 것이고, 실패를 통해서 온전케 하실 것이고, 어둠을 통해서 빛으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승리의 경험도 필요하지만 패배의 경험도 필요합니다. 빛도 필요하지만 어둠도 필요합니다. 어둠이 꼭 걸림돌만은 아닙니다. 어둠도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이 신비와 오묘에 우리의 삶을 맡깁시다. 이 신비와 오묘에 삶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와 오묘에 우리 삶을 맡길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를 희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