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죽는다. 삶과 죽음은 서로 맞닿아있다. 삶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유혹인 듯하고, 죽음은 소진한 삶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품 같다. 하지만 삶이 죽음을 아는 것 같지는 않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을 만큼 평생을 배움에 바친 공자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신앙의 사람 파스칼은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다만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길 없는 죽음 그 자체다.”라고 했다. 우리도 역시 죽음을 모른 채, 또는 죽음을 잊은 채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다. 그렇다. 죽음은 분명 인생 최고의 현실이다. 또한 이성의 레이더망에는 포착되지 않는 미지의 세계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질문을 던져보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양의 현자인 공자나 신앙의 사람 파스칼은 죽음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어떨까? 예수님도 공자나 파스칼처럼 죽음을 몰랐을까? 예수님의 삶을 훑어보면 수차례에 걸쳐 자신이 죽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예고했지만 죽음의 본질 ∙ 죽음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죽음이 무엇인지를 몰랐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예수님이 비록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적은 없지만 십자가에 죽는 과정을 깊이 관찰해보면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셨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유심히 살펴보자. 그분의 죽음은 갑작스레 찾아온 당혹스런 죽음이 아니었다.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내몰린 억지스런 죽음도 아니었다. 죽음과 싸우다가 패배한 죽음도 아니었다. 졸지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적 죽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죽음에 순응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은 죽음에 순응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분만큼 죽음 앞에서 당황하며 심각하게 고민한 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놓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전심으로 세 번이나 기도했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다. 그도 예수님처럼 신성모독이라는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죽음에 내몰렸지만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중국의 장자 역시 죽음 앞에서 호연지기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크라테스나 장자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깊이 탄식했고, 운명하실 때는 큰 소리로 영혼의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사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매우 낯설고 의아스럽다. 어쩌면 실망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왜였을까? 왜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좀 더 담대하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의연하지 못했을까? 나는 바로 여기에 기막힌 역설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나 장자는 죽음의 실체를 알지 못한 반면 예수님은 죽음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자. 만일 소크라테스나 장자가 죽음의 실체를 제대로 알았다면 어떠했을까? 죽음의 실체를 알고서도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었을까? 죽음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럴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의 실체를 알고서도 죽음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태양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태양이 사라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니까 말이다. 하여, 나는 저들이 죽음을 몰랐다고 판단한다. 장자는 죽음을 존재의 소멸이라고 생각한 듯하고, 소크라테스는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을 조금 앞당긴 것쯤으로 생각한 듯하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랬기에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의연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어둠이 없으면 빛의 빛 됨이 드러나지 않듯이 죽음이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식으로 보지 않았다. 생명이 쇠퇴하면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른다는 식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매우 낮선 것이었다. 창조적 질서에 속하지 않은 괴물 같은 것이요, 저주의 형벌로 인해 침입해 들어온 바이러스 같은 것이었다. 예수님에게 죽음의 본질은 숨의 끊어짐을 넘어 관계의 끊어짐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요 소외였다. 아버지 없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심연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음의 본질과 심연을 바라보고 계셨기 때문에 항상 당당하고 침착했던 분이 죽음 앞에서 황망해하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한 것이다. 죽음이 단지 숨 끊어짐이라면, 단지 자연스러운 생명의 끝이라면, 조금 일찍 죽는 것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고 탄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소크라테스나 장자처럼 허허롭고 의연하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죽음을 아는 분으로서 그처럼 멋지고 의연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예수님은 지금껏 아버지와 항상 함께 했던 분이다(요16:32). 아니, ‘함께’를 넘어 ‘하나’였던 분이다. 그런데 그런 분이 본질상 하나이신 하나님 -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며 소통하는 아버지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 불가능한 존재론적 현실 앞에서 어떻게 신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소크라테스나 장자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희미했기에,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깊은 어둠인지를 모르기에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죽음의 실체와 죽음의 심연을 꿰뚫어보고 아셨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영혼의 탄식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큰소리를 내질러야 했다.

  그렇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생명의 원수였다. 창조질서에 속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다. 죄에 대한 저주의 결과였다. 하여, 죽음에 순응할 수 없었다. 죽음에 생명을 내어줄 수 없었다.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의 실체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사람은 대부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해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에 기초해서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음에 굴복하거나 순응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시각이다.

죽음에 순응하지 않은 죽음

사람들은 보통 죽음에 순응하든지,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든지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에 순응하지도 않았고,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죽음에 순응하지 않는 죽음을 죽었다. 죽음의 실체를 끝까지 응시하며 죽었다. 죽음을 죽이기 위해 죽었다. 죽음의 심연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죽었다. 그렇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의 실체를 알고 죽었다.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죽음을 죽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첫 번째 특이점이다.

선택으로서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의 두 번째 특이점은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사역 초기부터였다. 아니,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가는 중에 헤롯왕을 만나 그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큰 소동이 일어났고 헤롯왕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했다(마2:1-13). 예수님이 사역 초기 어느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범했다며 헤롯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의논했다(막3:1-6). 사역 후반기에 들어와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다(막8:31, 10:45, 14:21). 그것도 한 번의 예고로 끝내지 않고 세 번씩이나 반복했다. 한 번으로 끝내버리면 혹여 제자들이 충분히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이라도 할까봐 확실하게 못 박을 요량으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보가 메시아로서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본격적인 걸음을 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죽음의 잔을 받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기 전에,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르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을 알고 죽음으로 나아간 선택적 죽음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이 말씀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삶의 중심, 삶의 목표가 대속적 죽음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보다 직접적인 진술이 나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면 분명히 빼앗긴 죽음이요 강탈당한 죽음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버지께 받은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발적으로 죽으셨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운명의 필연이 아닌 선택이었다. 사람에게는 죽음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고,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매여야 하는 운명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운명도 필연도 아닌 선택이었다. 비록 죽음 앞에서 신음하며 탄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 죽음은 선택이었다. 또 그분만큼 죽음을 아파하신 분이 없고, 죽음에 항거하신 분이 없지만, 동시에 오직 그분만이 선택한 죽음을 죽었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두 번째 특이점이다.

하나님이 죽인 죽음

  예수님의 죽음의 세 번째 특이점은 대제사장들이나 군중들, 로마의 병정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게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보라. 예수님은 먼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기도하시고 스스로 죽음에 잡히셨다. 왜였을까? 왜 이 때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해놓고는 스스로 죽음에 잡히셨을까? 그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버지의 원하는 바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에 대해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막14:21)고 했다. 또 마지막 만찬을 할 때도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이 내 몸이다’고 하셨고,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했다(막14:22-24). 이런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오래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일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보다 직설적으로 말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다.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신 분은 아버지시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짓밟힌 창조세계의 멸망을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던진 최후의 패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다.

  물론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일차적 진실이 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은 예루살렘 성전 담당자들 ∙ 예루살렘의 군중들 ∙ 로마의 군병들이라는 사실이다. 제자들도 물론 한 몫을 했다. 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작해야 육체를 죽이는데 일조했을 뿐 영혼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근원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사실 생명에는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깊이의 차원이 있다. 생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생명이 아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 있고, 죽었으나 산 것이 있는 것이 생명의 신비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1,5). 이게 무슨 말인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예수 밖에서 살 때에는 살아있었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겉 생명은 살았으나 속 생명은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체로 계시는 동안에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죽음의 삶을 살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무정란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예수님은 온 생명을 살았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근원생명을 살았다. 그림자 같은 삶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삶, 생활을 넘어 삶을 살았다. 그리고 죽음도 그림자 같은 죽음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죽음을 죽었다. 백퍼센트 완전한 죽음 ∙ 근원생명이 죽는 죽음을 죽었다. 아니, 근원 생명이 죽어야 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절대적 분리가 일어나야 했다. 그래야만 죄인들을 구속하고, 무너진 하나님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죽음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근원 생명은 사람이 죽일 수 없다. 권력이 죽일 수 없다. 폭력이 죽일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근원 생명을 죽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실제로 예수님의 근원생명을 죽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의 세 번째 특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