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면 좀 이상하지요? 평상시에 하던 대로 행동하면 익숙한데 갑자기 다르게 행동하면 어색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뭘 잘못 먹었나?’하면서 위아래를 훑어보게 됩니다. 만일 정용섭 목사님이 조용기 목사님처럼 설교한다고 해보세요. 여러분 모두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아니, 목사님이 지난 주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갑자기 저러시지? 그러면서 별별 상상을 다 하게 될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은 평상시의 예수님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은 언제나 차분하고 평안했습니다. 광풍이 불어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일발의 때에도 예수님은 배 안에서 깊은 잠을 잤고, 자기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 앞에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한 번도 당황하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움에 몸부림을 친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긴 했지만, 자신의 문제로 번민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는 분이었습니다. 매사를 깊이 응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때의 예수님을 한 마디로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인 예수님.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예수님.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거두어달라고 애원하는 예수님.

 

너무 낯선 예수님

 

여러분, 참 생경하고 혼돈스럽지요?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이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요? 예수님의 최근의 행적과 비교해 보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얼마 전에만 해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세 번씩이나 예고했었습니다. 순수한 나드 향 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동을 제자들이 탓할 때도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라며 칭찬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 중 하나가 자기를 넘겨줄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것이 내 몸이라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했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었다가 부활할 것까지도 말씀했었습니다(막14:27-28). 이처럼 예수님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버렸습니다. 지금껏 뚜벅뚜벅 자기의 길을 걸어오신 분께서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라 했습니다. 금심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저토록 괴로워하며 고민한 것일까요? 억울하게 죽음의 독배를 마셔야 했던 소크라테스도 저러지 않았는데, 장자는 죽음 앞에서도 유머를 할 정도로 호연지기를 잃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뒤따르는 순교자들도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죽어갔는데, 왜 예수님은 의연하고 당당하게 죽지 못하고 저토록 몸부림쳤을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요? 육체적인 고통과 고난에 대한 공포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괴로워하며 번민한 것은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실체를 깊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속에 담긴 것이 뭔지, 죽음보다 더 깊은 죽음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번민한 것이지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실체를 알았기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생명의 자연스러운 쇠퇴 현상으로 생각합니다. 생명의 기운이 쇠퇴하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동양에서는 죽음과 생명을 음양의 조화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둠이 없으면 빛이 드러나지 않듯이, 죽음이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매우 낮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창조적 질서에 속하지 않은 괴물 같은 것이요, 저주의 형벌로 인해 침입해 들어온 바이러스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숨의 끊어짐을 넘어 관계의 끊어짐이었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과 소외, 이것이 바로 죽음의 심연이었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에게 죽음은 단지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삯이요, 죄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사단의 권세의 실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짓밟고, 사단의 지배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갇힌 자들을 치유하고 해방시켜냄으로써, 죽은 나사로를 살려 냄으로써 예수님은 실제로 사단의 권세를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임박한 죽음 앞에 서있습니다. 사단의 권세에 짓밟혀야 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짓밟아야 할 분이 사단의 권세에 짓밟혀야 하는 역설과 모순에 처해 있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단의 권세에 순순히 응해야 하겠습니까? 죽음의 권세에 순순히 응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사단을 대적하고 저항해야지 사단의 손아귀에 잡아먹힐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죽음의 저주를 풀기 위해 오신 분께서 죽음의 저주 앞에 굴복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더욱이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이신 분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의 실체를 알고 죽음을 정복해야 할 분께서 죽음에 정복당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번민과 두려움이 일겠습니까? 정말 그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본래 알면 더 두렵고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불을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불이 뜨겁다는 걸 알지 못하는 갓난아이는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불을 만집니다. 옛말에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배웠다는 식자들이 대부분 용기와 과감성이 부족한 것도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모르면 무섭고, 알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앎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이 더 큰 법입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실체, 죽음의 본질을 깊이 아는 분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인 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단절이란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의 위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느끼는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마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번민과 고통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면에서 일반적인 죽음과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레 찾아온 당혹스런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피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내몰린 억지스런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과 싸우다가 패배한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졸지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 찰나적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죽음에 순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죽음은 생명의 원수였고, 창조질서에 속하지 않은 낯선 것이었고, 죄에 대한 저주의 결과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코 죽음에 순응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생명을 내어줄 수 없었습니다. 죽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음의 실체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정체

 

결국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몸과 온 영혼으로 신음하며 두려워하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낮선 행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출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몸짓이었습니다. 죽음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의 몸짓이었고, 죽음에 순응할 수 없다는 투쟁의 몸짓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봅시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행동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런 번민이나 저항의 몸짓 없이 얌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에 순응하는 죽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의 죽음과 같이 죽음의 권세에 짓밟힌 죽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번민과 투쟁의 시간을 통해서 죽음에 순응하지 않는 죽음을 죽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심연과 죽음의 실체를 끝까지 응시하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죽음을 죽이기 위한 죽음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결코 죽음의 권세에 굴복할 수 없는 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죽음, 죽음을 죽이는 죽음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고통과 번민은 죽음을 용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용인해야 하는 기막힌 모순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었습니다. 죽음에 굴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굴복해야 하는 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몸부림이었고 영적인 투쟁이었습니다. 죽음의 실체와 죽음의 심연을 꿰뚫어보고 아는 분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죽음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모순의 극치인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건 정말 모순의 극치입니다. 죽음을 정복해야 할 분께서 죽음에 정복당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모순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순의 극치인 이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의 사랑이 있을 수 없는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아들로서는 더 이상의 순종이 있을 수 없는 순종의 극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은혜가 있을 수 없는 은혜의 극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 예수님의 순종과 온 세상의 죄와 어둠을 덮는 은혜의 극치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이 모순 속에서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 죽음의 모순을 통해서 정점에 이르렀고, 온 세상의 구원 또한 이 죽음의 모순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순의 극치였지만 사랑의 극치였고, 순종의 극치였고, 은혜의 극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참 묘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한 모순을 통해서 구원의 큰일을 해내시거든요. 언뜻 보면 분명히 모순인데, 하나님은 그 모순을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시거든요. 이건 정말 우리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탁월한 지혜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어떠했습니까? 하나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거부하고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죽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도 그것이 비현실적인 모순처럼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사실 외면하고 회피해야 할 무거운 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따라 산다는 것이 굉장히 무거운 짐으로 보이고, 또 존재와 삶을 다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직시하고 삶으로 깊이 끌어안으면 그동안 무겁게 짓눌렀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이런저런 인생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은혜의 극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으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하는 신비가 펼쳐지는데, 모든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고 안식과 평화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 생명의 기운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짓눌려 있던 생명의 기운들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외면할 때는 거짓 평안에 안주하고 말지만 십자가를 품에 안으면 예수님의 품 - 참된 평안의 품에 안기는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분주함과 욕심 주머니를 내려놓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시고, 죽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죽음의 신비와 죽음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축복입니다. 고난 주간은 예수님의 죽음의 신비를 통해 삶의 무게를 비워내는 주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