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로 유명한 장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수록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5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전도에 관한 메시지로 많이 설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잃은 양을 찾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많이들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본문의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 유리한 대로 끌어다대는 아전인수식 성경 읽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평판이 좋지 않은 세리나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 듣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불평한 데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는 ‘죄인들’과 ‘의인들’로 지칭되는 두 계층이 갈등 관계를 이루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든지, 율법적으로 더러운 질병에 걸렸다든지, 술주정꾼이라든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라든지, 세리와 같이 로마에 협조하는 매국노라든지,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든지 하면 죄인 그룹에 속했고, 혈통적으로 순수한 유대인이나, 더러운 병에 걸리지 않고 육체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들, 율법을 문자적으로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의인’,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자’ 그룹에 속했습니다. 자칭 의인들은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을 의로움의 증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를 매우 불결하게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또 자신들의 정결함뿐 아니라 유대사회의 정결함을 위해서도 죄인과 의인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인과 죄인 사이에 선을 그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뒤섞이는 것을 금기시하며 경계해왔습니다. 결국 1세기 유대인 사회는 선악을 구분함으로써 유지되는 율법적 질서, 종교적 질서가 중요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대할 때 어떤 이유로도 차별하거나 선을 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항상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사회적인 잣대나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재능이나, 성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출신 배경 같은 것으로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헤롯왕이나 베드로나 가롯 유다나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세리나 이방 여인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해야 하는 존재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 주변에는 아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각종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로부터 시작해서 평판이 좋지 않은 죄인들, 로마의 앞잡이로 봉사하는 매국노들, 로마에 항거하는 열혈 유대주의자들, 진지한 구도자들, 이리저리 휩쓸리기 잘하는 생각 없는 군중들, 이방인들까지 참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었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는 것도 그렇게 낯선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1세기 유대사회의 근본주의자들이 볼 때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동으로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투덜거리는 게 당연했습니다. 왜 유대사회의 오랜 금기사항을 어기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저들이 불평하자 예수님이 저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이야기 한 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5장 이야기는 전도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재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논쟁이나 비판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논쟁이고 비판입니다.

 

예수님이 논쟁하고 비판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행동을 환기시키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나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합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을 깨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함께 기쁨을 나누지 않겠느냐?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를 향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잃은 것이 한 마리에 불과하다고 해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소홀히 하고 찾지 않는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동전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동전 한 닢을 잃었다고 해서 찾지 않고 방치하는 여인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찾을 때까지 찾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찾으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 아니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그렇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잃은 양 하나를 찾는 것이 주인의 보편적인 마음인데, 양뿐만 아니라 동전 하나를 잃어도 최선을 다해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너희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찾기는커녕 골짜기로 내몬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어도 외면하고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일차적인 비판입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통해서 보편적인 정서에도 미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사악함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판 속에는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만든 종교적인 잣대로 죄인들을 규정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해서 만든 것이긴 하나 율법의 정신은 외면한 채 피상적인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죄를 보게 함으로써 존재가 죄에게 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율법으로 사람을 억압했습니다. 율법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자들만 하나님을 독점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만유의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축소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을 내쳤습니다. 종교적 차원의 율법으로 종교적 차원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엄청난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율법 앞에 서야 하는 존재이지 율법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율법 앞에 서지는 않고 율법을 휘두르기만 했습니다. 죄인을 규정하고, 죄인을 울 밖으로 내쳤습니다. 죄인은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저들의 존재는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눈에 보여도 보지 않았고, 옆에 있어도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양도 그렇게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들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는 놓아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온 들판과 골짜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비록 짐승에 불과하지만 그 존재를 잊지 않고 찾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내치기만 했지 찾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의 존재 자체를 아예 외면하고 부정했습니다.

여러분, 피조물인 인간이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더욱이 존재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인 여호와를 믿고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처럼 잔인하고 오만하고 불의한 죄악은 없습니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독하고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런데 1세기 유대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는 그런 악독함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매우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타종교인들이나 기독교 밖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사탄의 자식이라고 바라봅니다. 전도하는 일에는 열심인데, 일상생활에서는 타종교인들을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합니다. 이슬람교나 불교 국가는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큰 재난을 당해도 긍휼의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선을 긋습니다.

또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몸을 파는 여자라든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든지,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시선이 어떻습니까? 매우 적대적이고 차갑습니다.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세상과 선을 긋고, 세상을 외면하고 세상을 정죄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과시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합니다. 사실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의 종교인들이나 오늘 그리스도인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1세기 유대사회 종교인들의 행동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봅시다. 저들이 죄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를 좀 더 깊이 파고들면 그 속에는 좀 더 교묘하고 치사한 인간의 사악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칭 의인들이 죄인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을 그어 놓고 죄인들을 선 밖으로 내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죄에 오염되는 게 무서워서일까요? 백로가 까마귀 노는데 가면 검게 될까봐 아예 선을 그어 놓고 함께 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칭 의로운 자들이 죄인들을 부정하고 선을 긋는 것은 선을 그음으로써 자기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자기들은 특별한 사람인 것을 과시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자칭 의인들이 죄인들을 볼 때마다 어떤 마음이 들었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저놈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기 만족감에 휩싸이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야말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자칭 의인들에게 죄인은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의인들이 자기 존재감과 종교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죄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죄인들을 멸시하고 내침으로써 자기들의 존재감과 영적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의 치사함이요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죄성의 어두운 면입니다.

 

사실 이런 치사함과 사악함은 형태는 다르지만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1세기 유대사회처럼 종교적인 사회에서는 의로움이 차별화의 중요한 전거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차별화의 중요한 전거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돈 있는 자들은 자기들만의 소비 영역을 만듭니다. 돈 없는 자들이 살 수 없는 고가의 명품을 보란 듯이 소비하면서 자기들은 특별 계층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과시합니다. 명품 자체가 탐이 나서가 아닙니다. 명품을 소비함으로써 사회적인 우월감과 차별성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명품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도 명품이 잘 팔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참 치사하고 사악한 방식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수준에서 놉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이 많으면 우리들도 대부분 그 치사함과 사악함의 수준에서 놀 겁니다. 백화점마다 명품 코너를 따로 만들고, 은행마다 vip 석을 따로 두는 것도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명품뿐 아닙니다. 지성인 사회에서는 어려운 낱말을 골라 쓰고, 학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은근히 자기 실력을 과시합니다. 무식한 놈과 차별화를 드러내고, 그런 차별화를 통해서 자기 존재감을 만끽하는 겁니다. 사실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치사한 존재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있는 치사함 하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각각의 비유 말미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늘의 기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주인처럼, 잃은 동전을 찾아 온 집안을 쓰는 여인처럼 하늘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는 회개할 필요가 있는 죄인 한 사람이 죄를 깨닫고 돌아설 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죄인들을 멸시하고 부정하는 자칭 의인들에 대한 직격탄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의 존재를 멸시하며 부정하고 있지만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멸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데, 하나님도 인내하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인을 멸시하고 부정하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은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해왔다고 준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저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며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철없는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에도 아버지는 돌아오는 날까지 아들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아들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집을 나갔지만 아들의 존재는 언제나 아버지 마음속에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난 오늘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존재와 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존재 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죄를 분리함으로써 존재를 회복시키자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에 먹힌 존재를 죄로부터 구출해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최종적인 행위가 곧 곧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잃은 양과 잃은 아들이 비유가 말해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긍정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존재가 죄에 오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긍정하십니다.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야말로 존재를 긍정하는 최고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존재를 긍정하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인을 판단하는 눈만 있었지 죄인의 존재까지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없었습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고,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데, 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그 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존재를 멸시하고 부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을 정죄함으로써 자기들의 의로움을 확보하고 확인하는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존재를 부정하려는 사악함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툭하면 등을 돌리고, 죽이겠다고 덤비고, 차별화하고, 선을 긋는 추악한 의지가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존재를 긍정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눈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를 긍정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