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는 매우 단순합니다. 갈릴리 언저리를 맴돌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돌연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돌려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를 가로질러 가시다가 어느 마을에서 나병 환자 열 명을 만나 낫게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이야기 속에는 매우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유대사회는 악성 피부병이나 나병에 걸린 사람을 매우 엄격하게 격리시켰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악성 피부병이라고 판단이 되면 즉각 가족과 마을을 떠나게 했습니다. 마을에서 일정한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게 했습니다(레13:46). 그런데 예수님이 한 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열 명이나 만난 걸 보면 그 마을은 나병 환자들만 사는 격리된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그 마을을 지나시면서 일반 마을과는 다른 음침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암튼 그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가장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목숨은 살아 있으나 죽음보다 더한 절망과 고독에 몸부림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서로의 절망만을 바라보며 죽음보다 더 슬픈 기구한 삶을 살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 소식을 어떻게 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정도는 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이 지금 자기네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문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일말의 기대와 호기심을 자극했겠지요. 그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이끌려 길거리로 나왔을 겁니다.

다행히 그들은 예수님 일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 이상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서 크게 외칠 뿐이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저들은 나병을 고쳐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불쌍히 여겨달라고 에둘러 자비를 구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였을까요? 나병을 고쳐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할 용기가 없어서였을까요?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비를 구하는 그들의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접촉하지도 않았고, 치유를 선포하지도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에둘러 말한 그들에게 예수님도 에둘러 말했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이 말씀은 모세 율법을 아는 유대인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만한 말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악성 피부병이 걸려도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야 하지만 악성 피부병이 나았을 때에도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야 합니다. 제사장이 보고 피부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격리된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는 것은 나병에 감염되었거나 나았을 때 밟는 공식적인 절차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아는 관습이고 절차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는 제사장에 가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갔습니다. 나병이 전혀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병이 나았을 때 가야 할 길을 갔습니다. 참 대단한 신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단한 순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신뢰와 순종 때문이었을까요? 가는 길에 몸이 깨끗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 사람의 나병 환자들이 동시에 깨끗이 낫는 정말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절대 절망에 신음하던 저들이, 서로의 절망만을 바라보았던 저들이, 깨끗해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들 어떻게 했을까요? 떨어져 있는 가족의 품으로 달려갔을까요? 아니면 제사장에게 달려갔을까요? 아마도 유대 사회의 관습대로 제사장에게 갔을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고 격리되어 지내던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어쨌든 그들은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제각각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가던 길을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고 혼자 탄식하듯 말씀했습니다. “열 사람이 낫지 않았느냐? 아홉 사람은 어디 있느냐?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이 이 이방인 말고는 아무도 없느냐?” 사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영적 무감각이 너무 마음 아파서 내뱉은 탄식의 말입니다. 돌아와 감사하지 않는 저들의 영적 무감각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물론 돌아오지 않은 자들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돌아와 감사를 표현하는 것과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은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돌아와서 감사를 표현한 것과 표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행동 자체만 본다면 행동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과 다른 아홉 사람의 행동을 매우 중요한 차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만일 그들의 차이가 단지 행동의 차이라면 예수님이 그 일을 그렇게까지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꼬투리를 잡듯이 감사하지 않은 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저들의 행동을 문제 삼은 것은 행동 속에서 행동 이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행동 속에서 행동 너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돌아와 감사한 자와 감사하지 않은 자들의 행동은 단지 행동의 차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보다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행동은 단지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동은 크든 작든 그 사람의 의지와 사상과 인식의 산물입니다. 내면의 의지와 사상과 인식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곧 행동입니다. 심지어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 무의식까지도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행동은 중요한 것입니다. 행동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행동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행동이 사람됨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이어서도 안 되고, 행동하는 것만이 가치 있다는 행동 지상주의도 매우 위험합니다. 행동 지상주의는 율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행동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행동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행동도 중요합니다. 마음은 마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하는 작은 행동,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언행에도 우리의 영적 인식의 어떠함이 묻어납니다. 사람의 언행 속에는 영적인 깊이가 담겨 있는 법입니다. 그런 면에서 행동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행동에서 저들의 영적 인식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만 인식했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고, 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병이 낫게 된 근원을 인식하는 데까지 지각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힘입어 병이 나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까지 영적 지각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렇게 영적 지각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돌아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하는 자와 돌아오지 않은 자의 행동 속에서 바로 이런 영적 지각의 차이, 영적 인식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물론 아홉 사람도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힘입어 병이 나았다고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과 아홉 사람의 인식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홉 사람의 인식은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보고 들어서 아는 정도의 인식, 다시 말하면 정보의 차원에서 머리로 아는 것에 불과했지 실체적인 영적 지혜에 눈을 뜬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저들의 행동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객관적으로 아는 것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사물은 객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지만 사람이나 하나님은 객관적으로는 아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인 지식은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성령과의 소통으로만 알 수 있는 지식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교리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지각할 수는 없습니다. 종교적인 정보를 아는 지식으로 종교적인 행위는 할 수 있겠지만 감사의 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정보의 한계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사를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물을 받고 감사하는 것이야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이겠습니다만, 삶 자체를 놓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매우 깊은 영적 행위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는 가장 심오한 영적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우리의 삶이 은혜에 잇대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눈뜬 사람이 아니면 감사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감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예배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우리의 신앙 행위에 감사가 빠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감사가 빠진 신앙 행위는 아무리 경건하더라도 신앙적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모든 신앙적 행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한 외식이거나 복을 받기 위한 종교적 거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사랑보다도 감사가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는 것도 사실 우스운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2조원을 들여 사랑의 교회가 지으려고 하는 교회당보다 열 배나 큰 교회당을 건축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가 되면 될까요? 온 세상을 복음화하면 될까요? 우주의 비밀을 속속들이 다 알면 될까요? 아닙니다. 어떤 것도 들에 핀 꽃 한 송이의 영광에 미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 무익할 뿐입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최상의 예배이며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가장 깊은 영성의 표출이요 존재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나병이 나은 것을 확인한 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의미 있게 평가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감사야말로 진정한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야말로 진정한 영적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아홉 사람은 나병이 나았다는 객관적인 사실만 보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만 보았지 그 이상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사실 자체, 사건 자체에만 주목하는 사람은 사건의 실체를 볼 수 없습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성령이 강림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들을 비롯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대부분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술에 취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도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는 사실 자체만을 보았기 때문에 성령이 임했다는 진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현상, 눈에 보이는 사건만 보았기 때문에 성령이 임했다는 더 근원적인 진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홉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홉 사람은 병이 나은 것만 보았지 병이 나은 진짜 근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을 힘입어 병이 나았다는 것을 정보로는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실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은 기뻐했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홉 사람은 병 나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나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삶의 세계,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병 나은 것 밖에는 볼 수 있는 눈이 없었기 때문에 병이 낫는 정도의 세계밖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삶의 세계, 구원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고 구원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하는 너는 이미 구원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고 구원했다.”고 선포함으로써 정말 중요한 것은 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구원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환기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정말 중시해야 할 것은 병이 나았다거나, 성공을 했다거나, 문제를 해결 받았다거나,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거나,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놀라운 사건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 은총의 세계에 나도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병이 낫는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 사람은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만 주목하고 거기에만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병 나았다는 사실 자체만을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당시 유대 종교인들의 일반적인 영적 상태였습니다. 종교적이기는 했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무지하고 무감각한, 그래서 감사할 줄 모르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만 중시하고 그것만을 기뻐하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세계, 은총의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에 참여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설교자들의 엉뚱한 설교에 익숙해 있고,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눈이 매우 흐려져 있습니다. 대다수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다고 애는 쓰지만 들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소음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속하지 않은 것들, 구원에 속하지 않은 것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종교적 헌신에 삶이 짓눌려 있습니다. 사명감은 넘치는데 감사의 영은 메말라버렸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매우 척박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눈을 돌리면 이 시대 교회의 영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감사에 매우 흡족해하시며, 그가 이미 구원의 세계에 몸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세계는 종교적 헌신이나 사명감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의 세계는 감사의 세계입니다. 그것도 조건적인 감사의 세계가 아니라 근원적이고 항상적인 감사의 세계입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감사하는 것보다 더 영적으로 깊이 있는 행동은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보다 더 진실하고 온전한 예배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의 세계에 눈을 뜬 자는 이미 구원에 참여한 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