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1년 새해 벽두에 톨스토이를 읽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아니라 미국 작가인 제이 파리니가 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읽었다. 전기적 성격의 소설인 그 책은 오랫동안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소설을 잘 읽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방치해 두었었는데, 책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하여 꺼내 읽었다. 연초에 너무 무거운 것보다는 좀 가볍게 읽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자극적인 재미는 없었지만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가출이 갖는 상징성에 마음이 끌렸다. 하여, 서가에서 잠자고 있던 또 한 권의 책 - 톨스토이의 큰딸이 아버지의 죽음과 가출에 대한 사람들의 억측을 해소하기 위해 쓴 [톨스토이]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오래 전에 읽었던 [참회록]을 또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참 많이 아팠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고, 진리 때문에 부부간에 화해할 수 없는 틈이 벌어져야 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팠다.

 

뒤늦은 가출

 

1820년에 태어난 레프 톨스토이는 20대 초반 소설 [유년시절]을 시작으로 죽을 때(1910년, 82세)까지 쉬지 않고 일기, 소설, 참회록, 인생론, 예술론 등을 쓴 대작가다. 그는 살아있을 때 이미 수많은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추앙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그런데 그런 그가 82세라고 하는 노구의 몸을 끌고 가출을 했다. 그것도 야밤에 아내가 잠든 틈을 이용해, 아내에게 들킬까봐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몰래 집을 빠져나가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3일 만에 병이 들어 아스타포보라는 조그만 시골의 간이역에 멈추고 말았다. 다행히 역장의 배려로 역장의 집에서 일주일을 묵으며 간호했지만 결국 회생하지 못하고 가출한지 열흘 만에 눈을 감았다. 아내는 남편의 소식을 듣고 특별 열차까지 세내어 간이역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끝내 아내와 만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가슴과 머리는 한 번도 텅 빈 적이 없었다. 그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항상 이야기와 고민과 아픔이 꿈틀대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는 완전을 향한 열정과 에너지로 충만했고, 중년에 들어서는 인생의 허무와 회심 사이를 방황하면서 고뇌를 반복하다가 50세에 [참회록]을 썼을 정도로 인생과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82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가출을 했다. 망령이라도 든 것일까? 아니다. 그는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가출을 하기 위해 고민하며 방황했었다. 막내딸이 태어나던 56세에 이미 첫 번째 가출을 하려다가 주저앉았고, 그 후로도 아내를 떠날 결심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 최소한 26년 동안은 가출을 고민했다고 할 수 있다.

 

가출의 원인

 

사람들은 대부분 톨스토이의 가출과 죽음의 원인을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에게서 찾는다. 소피야가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하고 지나치게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남편의 정신세계와 영적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생을 지나치게 가볍고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맏딸인 타티아나는 “다른 일도 아닌 이런 행위(가출)를 하게 하는 이유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중에서도 아버지와 같이 그처럼 훌륭하고, 그처럼 정열적이며, 그처럼 복잡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말이다. 거기에는 한없이 착잡한 동기가 있고, 그것이 융합하거나, 충돌하거나, 모순되거나, 타협하거나 하여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게 했다.”고 말함으로써 어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항변했는데, 나는 그녀의 항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 부부의 갈등과 갈등의 폭발로서의 가출은 소피야가 아니었더라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톨스토이와 같은 회심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누가 아내였든지 간에 부부간의 갈등과 불화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가출의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톨스토이가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 다시 말하면 톨스토이의 회심에 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십이 되기 전에 세상적인 생활의 한계와 인생의 절대 허무를 꿰뚫어보았다. 그가 한 남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잘 나가던 시절에 그는 [참회록]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의 저작이 내게 가져다주는 명성을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좋다, 너는 고골리나 푸슈킨이나 세익스피어나 몰리에르나 그 밖의 온 세계의 모든 작가보다 훌륭한 명성을 얻을 지도 모른다.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건가?’ 나는 이에 전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의문은 한가로이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런데 대답은 없었다.”(34쪽). 그러면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서있는 기반이 엉망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의 바탕이 이제 깡그리 없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에게는 살아갈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생활은 정지했다. … 마술 할머니가 찾아와서 네 희망을 이루어 주마고 하더라도 나는 할 말을 몰랐을 것이다.”(35쪽).

 

그가 말한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어떤 이유나 희망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처절한 절망뿐이었다. 자살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 물론 그가 바라던 꿈을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그는 백작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적어도 그때까지는 실패를 모르는 인생을 살았었다. 그 당시의 그는 인생의 최정점에 서있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더욱이 이와 같은 심적 상태가 내게 일어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완전한 행복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내 처지에 막 주어지고 있던 때였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착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과 내 쪽에서 별로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가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나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친구와 지인들에게 존경받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칭찬받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자신을 속이지 않더라도 내 명성을 해돋이의 기세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내적 불건강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내 동년배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훌륭한 정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 이런 환경에 있으면서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도달했던 것이다.”(37쪽).

그랬다. 매우 놀라운 역설이지만, 그는 인생의 최정점에서 인생이 살아갈 만한 것이 못됨을 뚜렷이 보았다. 이성을 통해 생존이 불합리하다는 것,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는 솔로몬의 탄식이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인생의 진실이라는 것을 보았다. 하여, 그는 “썩는 악취와 구더기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행위는 그것이 어떤 행위이건 조만간에 모두 잊혀질 것이며, 나라는 존재도 완전히 없어져버릴 것이다.”(38쪽)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어떻게 사람들은 이 사실에 눈을 감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참 놀라운 일이다!”(38쪽)라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가 아니었다. 존재 전체가 걸린 문제였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한 사람의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행복의 모든 것을 얻었지만 모든 것의 궁극적 허무를 보았기에 더 이상 그 길을 걸아갈 수 없는 심연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신앙으로 회귀한다. 특별히 농민들의 삶을 튼실하게 뒷밭침하는 신앙의 세계로. 물론 그들의 신앙 속에도 미신이 섞여 있으며, 모든 종교 안에도 거짓과 미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죽을 때까지 진리만을 추구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신앙은 유일한 출구였다. 그가 참회록에서 “그 당시의 나는 살기 위해서 꼭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110쪽)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 당시의 그에게 신앙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암튼 그 후부터 그의 관심은 신앙과 진리가 전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속에 허위가 섞여 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진실과 허위를 발견하여 이 둘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123쪽).

 

톨스토이는 이처럼 인생에 대한 처절한 고뇌와 인식을 통해 절대 절망에 도달했고, 동시에 신앙으로의 회귀를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었다. 큰딸 타티아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전에는 그녀(어머니 소피야)를 1등차가 아니면 태우지 않았고, 또 그녀와 아이들을 위해 최고급 상점에서 최고급 의상과 구두를 맞추어준 사람도 그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들에게 농민들과 같은 생활을 강요한 사람도 역시 그였다. … 어째서 지금, 오락과 여가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생활을 버리고 노동과 내핍 생활로 달려갈까? 어머니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또 타티아나는 그 원인에 대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이렇게 말한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뒤떨어지는 가족들은 아버지의 내적 회심의 길벗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뒤를 쫓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비슷비슷한 전통과 환경 아래 이룩된 전통 가정이었지만, 가장이 갑자기 온 가족의 길들여진 생활을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가족에게도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한 번도 상의한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신념을 이야기한 일이 별로 없었고, 내면의 괴로움을 오직 혼자서만 참고 견뎌 나왔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 진전 단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눈앞에 닥치게 되곤 하였다.”

 

자,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톨스토이 부부의 갈등과 불화가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인생의 궁극적 진실인 절대 허무를 본 자와 보지 못한 자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충분히 상상이 됐다. 사실이었다. 부와 명예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은 톨스토이에게는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었다. 하인의 수종을 받는 것, 노동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 가진 자들과 화려한 만찬을 즐기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없었다. 저택과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없었다. 이전에는 즐거움이었고 만족이었고 자랑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수치요 죄악일 뿐이었다. 더욱이 헨리 조지의 [토지국유론]을 읽고는 지주생활을 청산하는 선언을 했고, 농민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어야겠다고 나섰다.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사치에 빠져 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사는 것, 이제는 더 계속할 수 없소. 아이들의 교육 역시 내가 해롭다고 판단되는 환경에서 받게 하고 싶지는 않소. 이제는 집과 영지의 소유자만으로 있을 수는 없소. 이런 생활은 어느 구석을 봐도 견딜 수 없는 고통뿐이오. 나가든지 아니면 생활을 바꾸든지 하겠소. 우리 재산을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농민들처럼 자기 힘으로 일하면서 살아가야 하오.”라고 말하면서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뜻을 밝혔다. 하지만 소피야는 “당신을 죽이겠어요. 생활을 바꾸다니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모르니까요. 어떤 망상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 때문에 행복한 지금의 생활을 내팽개쳐야 하다니요. 왜 그래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대꾸했다. 그랬다. 이것이 그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톨스토이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회심하기 이전까지는 둘 사이가 원만했었지만 회심 이후에는 점차 틈이 벌어져 나중에는 날마다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소통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

 

다시 말하지만 톨스토이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은 것을 얻었고 누렸다. 그는 모든 것이 원만했고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진리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진리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전의 행복은 고통의 원인이 되었고, 이전의 자랑은 수치가 되었다. 부부간의 사랑에 금이 갔고, 가정의 평화가 흔들렸다. 마음으로 꿈꾸는 진리의 삶과 진리에 어긋나는 자신의 처지를 번민하면서 날마다 가출을 꿈꾸는 잔인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자, 이렇게 된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톨스토이에게 물어야 할까? 소피야에게 물어야 할까? 물론 소피야를 칭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를 비난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톨스토이나 소피야에게 책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인간이 죄인이라는 면에서 그들의 책임을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적절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상황의 궁극적인 책임은 톨스토이를 깨운 진리(톨스토이의 신앙이 십자가의 예수에 기초한 신앙인지, 아니면 진리에 대한 헌신과 사랑인지에 대해서는 더 깊은 고민과 확인이 필요함)에 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나는 회심 이후의 톨스토이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는 말씀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이 톨스토이에게 그대로 적중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마5:9,44).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고 했다(롬12:18).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가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진리를 따라 살다 보면 불화와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 때문에 꼭 불화해야 하는 것일까? 진리를 따라 살면서도 평화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진리와 함께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과연 불화와 가출이 최선이었을까? 참 쉽지 않은 문제다. 톨스토이를 읽고 나서 나는 그 고민에 빠졌다.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