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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날이다.

올해에는 내가 아는 아이 중에 수능을 보는 학생이 있다.

은주씨 아들 지헌이다.

엊그제 읍내에 나간 김에 지헌이를 위해 제과점에서 찹쌀떡을 하나 샀다.

 케익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그냥 사는 것으로 했다. 맘에 들지는 않지만.

요즘은 아예 수험생 응원용 찹쌀떡이 시판된다. 

 간단한 카드를 그려서 찹쌀떡과 함께

 은주씨 퇴근길에 전해주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수능을 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자기 전에 보니 은주씨에게 카톡이 와 있다. 

내가 준 선물 사진을 찍어 이런 글과 함께.

"언니 그림에 왜 내가 울컥하지? ㅋㅋㅋ

언니 너무 고마워. 감동이야~~"


은주씨로부터 지헌이가 수능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들었다.

그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간다

사십여 년 전 나도 그랬으니까. 떠올리기도 싫은  싫은 고3의 시간들..

그놈의 줄 세우기 시험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제도일까.


은주씨의 카톡을 읽으며 그 떠올리기 싫었던 고3 수험생 기간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때 나는 혼자 자취를 하며 고3을 지나고 있었다. 

도시락을 두개 씩 싸가면서 아침 일찍 등교해서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파김치가 된 채로 잠을 자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다시 도시락 두 개를 

싸서 등교하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고달프고 지겨웠는지. 

집에서 무한 지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고3 수험생 기간을 보냈으니 공부가 될 리가 만무. 

하루하루가 지옥같고 스트레스만 쌓여가고...

하교길에 교통사고라도 당해 이 기간을 피하고 싶을 정도였다.


수능이(그 때는 예비고사였다.) 가까워 온 어느 날이었다.

당연 불이 꺼진 방이어야 하는데 내 자취 방에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데 작은 봉지 하나와 메모 하나가 놓여있었다. 

도너츠 몇 개가 든 봉지와 이런 내용의 메모였다.

"조카들 주려고 샀는데 니 생각 나서 들렸어. 맛있게 먹으렴...! 영희언니."

교회 언니가 두고 간 것이었다.


캄캄한 빈 방이 아닌 불 켜진 방 만으로도 따뜻했는데

맛있는 도너츠에 메모까지. 

영희언니의 온기가 아직도 방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사십년이 더 지나도록 따뜻한 기억이다.


또 하나의 기억.

정말 시험을 코 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오빠의 절친이였던 은석 오빠가 보자기에 싼 김치통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ㅎㅎ

스물 두살 청년이 젓갈 냄새나는 김치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타고 오다니...

우리 오빠라면 가오 빠지는 일이라 절대로 안했을 거다. 

그런데 그 오빠는 전혀 개의치 않게 들고 와서는 이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우리집 김장했어. 먹어보라고 조금 가져왔다.

그리고 야,  시험 잘 봐라~!"


 지금도 영희 언니의 도너츠와  메모, 은석 오빠의 갓 담근 김장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한없이 스산했던 고3 여자애의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던 것들이다. 

그들은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정성이 담긴 수제 케익이 아닌  찹쌀떡으로 대신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떡과 카드 속에서

지헌이가 그 옛날 내가 받았던 위안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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