즘 재밌게 읽은 책 중에 하나가 

 루시 머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이다.
원제목이 < Anne of green gables>이니
<초록지붕 집의 앤> 정도로 번역이 될까?

전 세계 여자아이들 중에 앤을 모르는 소녀가 있을까 싶을 만큼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 되어있는 명작.

소녀 취향의 소설을 오십이 훨씬 넘은 아줌마가,
그것도 몹시 빠져 읽었다면
아무래도 지적 수준이나 정신연령을 의심해 볼 일이겠다.

이 소설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말 쯤으로 기억된다.
교실에 한 켠에 비치된 동화책을 통해서였다.
5학년 말에서 6학년 초까지 잠시 다녔던 산골 초등학교는
서울 S부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서 교실에는
그 고등학교에서 보내 준 동화책들이 많았다.
다양한 아동서적을 구해  읽을만한 환경이 못되었던 터라
교실에 비치된 그 많은 동화책들은 마치 보화 같았다.
 그런데 그 책들은 아이들의 관심 밖이어서
나는 그 다양한 동화책들을 독식하다시피 하나씩 섭렵했는데
그 중에 만난 걸작이 바로 <빨간머리 앤>이다.
하도 재밌어서 집에까지 가져와 아버지의 서재로 쓰던
 윗방 구석에 쳐박혀서 읽어 나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둑침침했던 아버지의 서재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당당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감성적이고
무엇보다도 상상력이 풍부해서 끊임없이 수다스러운 아이.
평범한 이름 앤 대신에, 코딜리아라고 불러 달랬다가
마릴라에게 냉정히 면박 당하는 장면에선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빨간머리 때문에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다는 사랑스러운 소녀ㅡ.
그 주인공 소녀 앤과 비슷한 또래였던, 그리고
빨간 머리는 아니지만 곱슬머리에 말라깽이였던 나는
단숨에 이 동화 속의 주인공에 이끌렸고 앤이 일으키는  재미난 사건, 사고들에 매료되었다.
책 서두에는 소설의 인물들을  짧은 글과 그림으로 묘사해 놓았던 것도 기억한다.
그런데 거기 그려진 캐릭터들이 내 상상에 못미쳐 실망스러웠던 기억도.^^

1900년대 초반 캐나다의 한 섬마을 소녀 앤은
그렇게 강력한 흡인력으로 1970년대를 살아가던 동양의 산골소녀를 매혹시켰다.
소설의 배경이었던 20세기 초반의 서구 문화역시,
환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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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30대 초반, 두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 빨간머리 앤을 만났다.
 저녁마다 어린이 프로그램시간에 방영하던
만화영화를  한 회 한 회를 넋 놓고 보았다.
tv 화면 가득 사과꽃잎이 흩날리던 영상이 매우 현란했고
 

아기를 안고  만화영화를 보던  그 시간 속,

작은 아파트 거실 분위기도 아련히 그립다.

지나간 추억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땐 철없는 엄마였던 나도  앤처럼 가슴 뛰는 일이 꽤 있지 않았을까.... 

 앤 셔얼리를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은 
 십여년 후  맨체스터의 <PAST TIME> 이란 골동품 가게에서다.
호기심에서 들어간 그 가게 안에서 나의 Past time을 상기시키는 반가운 물건을 하나 발견했는데
바로 어렸을 때 그렇게 빠져들었던 <빨간머리앤> 을 드라마로 만든 비디오테입 셋트였다.

 캐나다 tv방송에서 1985년부터 1999년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연작 드라마였는데

망설임 없이 그 비디오테입을 샀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알아 듣지도 못하는 대사를 여러번  되돌려 보면서
우중충한 날씨와 타국생활의 어려움을 달래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드라마 속의 배우들은 그 옛날 동화책 속 삽화와는 달리
 내 상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아 좋았다.


드라마는 어린 앤이 자라서 집을 떠나고, 작가가 되고 
 매튜가 죽고,  의사가 된 길버트와 결혼을 하고
 1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같은 배우가 아역에서 성인으로 변해가며 출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드라마 속의 인물들이 성장하고 늙어간 것 처럼,
독자였던 나도 어느새,
사십대 아줌마가 되어 빨간머리 앤과 해후를 했던 것이다.
가버린 젊음과 그에 대한 회한이 알싸하게 고개를 들던
젊지도 늙지도 않은 인생의 중간지점에서.
그리고 그렇게나 신비스럽던 소설 속의 서구문화가

조금은 따분해져 버린 영국이란 나라에서.

다시 여러 해가 흘렀고,
오십을 훌쩍 넘긴 중년의 나이에 나는 다시 빨간머리 앤을 찾았다.
이번에는 컴퓨터 속의 오디오 북으로!
처음 이 동화를 접하던  40여년 전과 비슷한 시골 마을로 돌아와서.


앤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생기발랄한데

나는 어느덧 반백의 여인이다. 

특히 바랄 것도 없고 크게 가슴 뛸 일도 없다.

그런데 가슴으론 아직도
꽃잎이 날리는 에본리의 아름다운 전원풍경에

 가슴뛰는 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사십여년 전과 똑같이 울고 웃는다.. . 문득 꿈결 같다.

 

헌데  이제는
격정적이고 호기심에 불타는 어린 앤 보다
호들갑스런 린드 부인의 수다가 귀엽게 여겨지고
흔들의자에 앉아 뜨게질하는 마릴라의 모습에 더 마음이 가는 걸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몇년 후

내게 손녀가 생긴다면
그 손녀딸을 안고서 단연 이 동화를 읽어주련다.
가능하면 실감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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