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가 시작이다.

산에서의 하루하루는 매우 단순하다.

눈 뜨고, 먹고, 짐을 꾸려 길을 떠나고저녁이 되면 머물 곳을 찾아 짐을 풀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잠이 들고. 이런 식의 반복이다.

오늘도 아침식사 후, 풀었던 짐을 다시 챙긴다. 아침마다 새로 짐을 꾸리는 일도 쉽지가 않다.

 꼼꼼한 남편은 두 사람의 포터에게 공정히 무게가 가도록 짐을 꾸리면서 등이 닿는 부분에

오리털 파카와 슬리핑 백으로 두툼하게 쿠션을 넣는 일도 잊지 않는다

포터의 등이 배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은 얼마만큼일까.

같은 기간을 보내는데 포터, 가이드의 짐은 우리에 비해 놀랄만큼 단촐하다.

왜 같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필요한 게 이리도 많고, 저들은 저렇게 간단한 걸까.

 욕심의 무게와 비례하는 것 같다저 포터들의 등이 짓눌리도록 얹혀진 내 욕심의 무게를 본다

결국 길을 간다는 건 남에게 짐을 지우는 일인가 보다. 사람에게, 자연에게..

살아 갈수록 줄여가야 할 무게들... 내 안의 욕심도 버리고 할 수만 있다면 홀가분하게 길을 가고 싶다

그리하여 숨을 거두는 그 날, 학처럼 가볍게 떠날 수만 있다면.

 

트래킹 내내 남편과 딸아이에게 못마땅했던 건, 물과 휴지 때문이었다.

산 속을 걷다 보면 지천으로 터져 나오는 게 맑은 샘물인데 그 물을 마다하고 물을 사먹고 다닌다.

"미네랄 워터"만 안전하다는 것이다. 젠장, 그 놈의 뱃속은 구조가 특별한가샘물만 마셔도 멀쩡하구먼….

가이드와 포터가 마시고 다니기에, 나도 보란 듯이 산 속의 샘물을 벌컥벌컥 받아 마셨더니 남편은 펄쩍 뛴다

배탈이 나면 큰일이라나. 그렇게 배탈이 무서우면 끓인 물을 수통에 담아가지고 다니면 되련만.

(실제로 나는 끓인 물로 열흘을 버텼지만 멀쩡했다.)

산이 높아감에 따라 물가가 가파르게 올라서 물값도 만만치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환경이 염려된다.

 산에서는 평소보다 두 배나 물을 더 마시게 되는 데 오는 이들마다 하루에 두세 병의 페트병을 버리고 간다면

이곳은 순식간에 페트병으로 쓰레기더미가 될 것이다

또 하나 맘에 안 드는 것은 휴지. 인도도 그렇지만 네팔에도 화장실에 휴지가 없다.

물자가 귀한 산속은 더하다. 휴지 대신 물통과 바가지가 놓여 있는데 물로 뒷처리를 하라는 말이다.

볼 일을 본 다음, 물로 씻어 낸 후, 좀 귀찮긴 하지만 작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비누로 깨끗이 빨아 말리면 휴지를 안 쓰고도 훨씬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잔뜩 가져 온 물휴지라도 쓰지, 가져 온 물휴지는 그대로 모셔 두고 화장실 갈 때마다

 또 마른 휴지를 듬뿍 쓴다. 용도가 다르다나? 산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물가도 가파르게 올라가

 형편없는 휴지가 2,000원을 넘는데 그걸 아낌없이 풀어 쓰다니, 영 못마땅하다.

 그럴 거면 뭐 하러 무거운 물휴지를 잔뜩 가져와 포터의 등을 무겁게 하냔 말이다

개념 없는 인간들과 함께 다니려니 볼 때마다 속에서 부아가 끓는다

미네랄 워터 대신 샘물을 마시지 못하고, 볼 일을 본 뒤에 물 대신 꼭 화장지를 써야만 되겠다는 인간들은

 입산을 금지시키는 법이라도 만들었음 싶다. 으이구, 이꼴 저꼴 안 보려면 그저 혼자 다녀야 하는 건데..!

 

또 한가지 참을 수 없는 건 남편의 심한 코골이다.

롯지라는 게 통나무로 만든 거라서 숭숭 뚫린 벽이 엉성하기 그지없는데 남편은

 천지가 진동하게 코를 곯아대는 것이다. 평소 때도 이 천지개벽할 코 고는 소리 땜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여기 와서는 피곤해서 그런지 그 데시벨이 한결 높아졌다가히 히말라야 호랑이가 포효하는 굉음이다.

내가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옆방 사람도 무쟈게 괴로웠나 보다.

오죽하면 한밤중에 나무 벽을 톡톡 치기까지 했을까.

 

그리고 또 하나, 공개하기 뭣하지만... 도저히 참아주기 어려운 남편의 생리현상.

시도 때도 없이 장풍을 발산한다. 미네랄 워터만 마시고 다닌 청정인간이 왜 그렇게

고약한 독가스를 품어대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여러모로 환경오염의 주범이 아닐 수 없다.

패트병이야 내게 직접 피해가 오지 않지만, 이 무지막지한 공해유발은 한 방을 쓰는 내겐 정말 치명적이다.

그나마 슬리핑 백을 각자 써서 망정이지. 한 이불 속이라면 난 아마 질색해서 죽었을 거다.

 자기도 견딜 수 없는지, 애꿎은 슬리핑 백을 탓한다.

 "이 침낭은 다 좋은데 말이야.. 가스배출구가 없단 말씀이야.." 

하여간 여러 대상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 주변사람에게, 또 자연에게.^^

 

쓸데없는 얘기로 서두가 길어졌다.

 오늘은 라마호텔(2,340m)를 떠나 고라타벨라(3,020m)-->랑탕(3,500m)까지 걷기로 했다.

어제보단 짧은 거리지만 고도가 높아지므로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 또 떠나보자.

고라타벨라까지 오자, 점점 숲길이 사라지고 돌짝밭으로 척박해진다.

식물성장 한계선에 다다랐는지 나무도 메마른 가시나무와 덤불뿐이다.

 점점 몸이 힘들다힘들어서인지 점심생각도 없다.

 고라타벨라에 도착해서 남편과 아이는 점심을 먹는데 나는 그냥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뜨거운 차도 음식도 아무것도 먹고 마실 생각이 없다.

그런 와중에 어린 딸 셋을 데리고 트래킹 중인 영국부부를 여기서도 또 만났다. 이들을 보자 기가 질린다.

  혼자 몸도 어려운데 어린아이를 셋이나 데리고 오다니. 그녀는 오히려 내 안색을 걱정한다.

 

 한동안 쉬고 나자 기력이 솟는 것 같아, 우리는 다시 랑탕을 향해 길을 떠났다.

 갈수록 산소가 희박해지는지 점점 머리가 무거워지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세진다 싶더니 오후 늦게부터는 눈발까지 휘날린다.

아아.. 천지가 청회색이고 사방이 깊은 회색빛 산이다.

 내가 뒤쳐져서인지 앞에도 뒤에도 사람이 없다.

휘날리는 눈발 속을 허위적 허위적 걷자니 아스라한 이 풍경이 영화 속 장면인지, 꿈 속인지 분간이 안 된다.

서서 걷는 인물은 또 현실 속의 나인가, 꿈 속의 가상인물인가?

 하얗게 휘날리는 눈발을 가르며 휘청휘청 걸었다.

날리던 눈발이 이윽고 우박이 되어 떨어지는데 고개를 넘어오는 한 소녀가 눈에 띈다.

나를 보자 양말을 달란다. 그녀의 발을 보니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꽁꽁 언 발이 갈라져 터져있다. 어쩌나, 양말은 모두 포터의 짐 속에 넣었는데

앞서 간 포터는 행방을 모르겠고 줄 양말이 없다. 신고 있는 양말을 벗어 줄 수도 없고.

미안하다, 양말이 없구나.” 했더니 소녀는 샐쭉한 얼굴로 지나쳐 간다

흔하고 흔한 양말 하나를 못 신은 소녀의 언 발이나, 없다고 하니 삐치는 얼굴, 모두 다 오랫동안 밟힌다.

 영국의 자선단체 가게에서 버려지는 산더미 같은 옷가지와 양말이 아른거린다.

왜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지...

 

드디어 랑탕이다, 해발 3.500m까지 오른 것이다.

기세 좋은 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롯지 뒤로는 랑탕의 장엄한 산이 자태를 드러낸다.

드디어 히말라야에 온 게 실감이 난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푸는데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둣한 두통을 느꼈다.

아까 부터 머리에서 울리던 북소리가 랑탕이 가까와 옴에 따라 점점 크게 골을 때린다 싶더니

 둥둥둥 심하게 골이 울린다. 보통 두통이 아니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우려했던 고소증세가 들이 닥친 듯. 그렇게 주의해서 천천히 왔건만.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나만 그렇다. 결국 3,500m에서 고소가 온 것이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조금만 움직여도 골이 찌근거려 참을 수가 없다.

만사가 귀찮아지면서 불가에만 쪼그리고 앉고 싶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

  밤새 머리에서 큰 북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잠을 청해도 극심한 두통은 여전하다.

참을 수 없는 두통 때문에 한 밤중에 잠이 깼다. 겨우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문을 열고 나선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어쩌다 올려다 본 하늘, 와아~~, 이게 웬 향연인가!!!

까만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

별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웅크린 산은 말이 없는데

하늘의 별들만 선명히 깨어나 찬연히 속삭이고 있다.

산이 높아서인지 하늘이 바로 머리 아래로 내려온 것처럼 별도 한결 크고 가깝다.

손을 뻗치면 닿을 듯 하다.

이렇게 많은 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릴 때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바라본 여름밤 하늘도 이렇게 별이 많지 않았다.

알퐁스 도데의 <>이 떠오른다.

목동과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지새우던 산 속의 밤하늘도 이러했을까. 큰 별, 작은 별...

난간에 기대서서 두통도 잊은 채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의 축제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수억만 년의 시간을 달려 와 지금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저 별들…! 그 아래 내가 숨쉬고 있다니.

랑탕의 밤하늘 아래서 이렇게 느닷없이 현란이 쏟아져 내리는 별빛과 만났다.

( 2009.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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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랑탕으로 출발~! 보이는 허름한 숙소가 우리가 묶은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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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탕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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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지를 닮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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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여행자들이 차를 마시며 쉬고 있다. 우리는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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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가 온 산은 내게 경외감과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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