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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서 살면서 민감해 진 것이 있다면 날씨입니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고기압도 되고 저기압도 되니
아침에 일어나면 나도 모르게 창 밖의 날씨를 살피게 됩니다.
 
그런데 영국날씨라는 게 여름 한 철을 빼고는 거의가 다 우글쭈글해서
 
제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도 침울해질 수 밖에 없을 거라고 투덜거리곤 한답니다.
날씨를 들먹이는 이곳 사람들의 인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더군요.
지난 몇 달 동안 늘 그러했듯이 우중충하고 흐린 겨울날씨이었는데
오랜만에 맑고 화창한 날을 맞았어요.

창문을 활짝 열고 집안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묶은 먼지를 닦아내고 화초도 손질해주었어요
밝고 명랑한 기운이 집안에 넘실넘실 스며들었습니다.
괜스레 울적했던 마음도 밝아지고요생기가 온 몸에 쫘악 퍼지는 것 아니겠어요?
오랜만에 상큼한 기분전환이었습니다.
우리 몸이 이렇게 대지의 기운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저녁 무렵프로젝트를 완성하느라 애를 쓰고 있는 딸아이와 함께 공원을 걸었습니다.
노을 빛이 석양의 하늘을 물들고 있었습니다.
드넓은 잔디밭에 홀로 서 있는 검은 고목 사이로 붉은 노을 빛이 물감처럼 번져가는 광경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탄성이 저절로 나왔어요.
그 순간 왜 갑자기 삶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왜 충만한 감사가 내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공부에 지친 딸아이도 머리가 맑아지는 모양이었어요.
경기침체로 17년간 이어 온 일을 접으며 속이 시끄러운
서울의 남편에게도 이 노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대지에서 불어오는 저 바람과, 노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이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느낀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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