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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는 가장 오랜 친구입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도 전부터였으니 그야말로 소꿉친구지요.

우리가 그 동네로 이사 온 봄, 숙이 엄마가 수줍은 얼굴로 빨갛게 익은 탐스런 앵두 한 바가지를

가져 오셨다는 순박한 사연을 어머니로 부터 들었어요.
그 후 숙이 어머니는 교회에 나오셨고, 우린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는 친구가 됐지요.

 같이 놀다가 간혹 삐치면 늘 먼저 헤~~하고 풀어지는 쪽은 언제나 숙이었어요.

 

숙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폐결핵을 비관해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어요.

 젊은 아내와 두 남매, 그리고 노모를 남겨둔 채.

숙이 아버지가 농약을 마신 날 밤, 동네가 발칵 뒤집혔어요.

우리 아버지와 동네 청년들이 숙이 아버지를 들것에 싣고 읍내로 내달렸지만
결국 목숨을 구하지 못했답니다.

숙이 아버지 장례식이 있던 날,
소복을 입은 숙이 엄마는 관을 넣기 위해 파놓은 빨간 황토 흙더미 위에서 떼굴떼굴 구르셨어요.

숙이 엄마의 하얀 소복에 묻어나던 황토 흙과  

하얗게 넘어가던 절규가 사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영상처럼 각인 되어 있습니다.

 

할머니의 손주 사랑은 끔찍했지요. 손이 귀한 집이어서 그랬는지

숙이 오빠는 본명을 두고도 "오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어요.

그런 천한 이름을 가져야 명이 길다는 거예요.

 숙이 할머니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감추어 두었다가 숙이를 주시고,

학교 갈 때는 털실로 손수 뜬 장갑과 양말로 퉁퉁 싸서 내보내시곤 하셨지요.

나는 그 투박한 털실 장갑이, 양말이 부러웠었지요.

아니, 할머니의 사랑이 부러웠습니다, 내게는 없던 할머니 사랑!

 

말수가 적은 숙이 엄마는 청상에 과부가 되어 두 남매와

까탈스런 시모를 모시고도 묵묵히 살아내셨어요.

그 많은 한을 안으로 삭이면서도 늘 무던한 얼굴이셨지요.

숙이 말에 의하면 엄마에게 욕을 듣거나 등짝 한 번 맞은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그런 엄마를 회상하며 살짝 눈물이 돌더군요.
그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분이겠지요. 숙이와 오빠는 구김 없이 자랐고

모두 고향을 지키면서 순하고 착하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헤어진 후로도 가끔 연락이 닿곤 했는데

 숙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일찍 사회인이 되는가 싶더니 

그 고장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고 했습니다. 신랑은 말단 공무원이고
고향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산다고 했습니다

내가 한창 젊음의 자유를 만끽하고 다닐 때.
그 애가 결혼 해 사는 곳을 지나다가, 잠깐 만난 적이 있었는데

꼭 자기를 닮은 딸을 안고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 후에도 십 년에 한 번 정도 뜸하게 얼굴을 봤지만

여전히 오랜 친구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고향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언제라도 . 나는 늘 여기 있을 테니."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몇 년에 한 번을 만나도 고향처럼 편안한 친구.

곰삭은 정이 느껴지는 오랜 벗.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한 그녀의 남편 역시 성실히 고향을 지킵니다.

 올해는 승진도 했답니다.

부부가 같이 고향 교회를 섬기면서 소박한 신앙을 지키면서

십 년도 넘게 22평 아파트에 살아도 크게 욕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 둘을 다 키우고 이제는 남편과 같이 산에 다닌다고 합니다.

물 흐르듯 순하게 사는 그 친구를 볼 때마다 "순리"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공부도 나보다 못했고 키도 작았던 친구,
늘 내게 져주곤 해서 만만하던 숙이가 요즘엔 나보다 커 보입니다.

그악스럽게 재산을 모으려고 하지도 않고

남을 샘내지도 않고, 그저 자족하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자연스런 모습 때문이지요.

말이 쉬워도 어려운 것을 그 애는 아무 의식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내 오랜 친구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다 표현하지를 못하겠네요.

자신의 얘기가 공개된 걸 안다면 숙이는 뭐랄지 모르겠습니다.

내심 한 자락 믿거라 하는 건, 그녀가 인터넷과 담을 쌓고 산다는 것과

또 안다고 해도 분명눈이나 한 번 흘기고는 ... 하고 웃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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