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끔은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상상을 한다. 산티아고 어느 외딴 길, 간신히 찾아든 그늘에서 땀에 젖은 양말을 말리다가 먼발치, 그림자 거두며 사라지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배낭을 메고 다시 일어서는…
그렇게 상상이 쌓이다가 보령을 떠났다. 걸어야 할 길, 산티아고보다 더 외로운 노둣길에 서기 위해 섬으로 나섰다. 길은 섬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돌 하나 던져서 갯벌에 빠진 너를 건지고, 네가 던진 돌을 딛고 물을 건너는 길이 오래전에 섬에 있었다. 그 길이 찬찬히 걷고 싶은 사람을 부른다. 노둣길 위에서 너의 모습을 돌아보라고. 너는 누구를 위해 돌 하나를 던질 수 있냐고…
2. 아침 6시, 제법 상큼한 공기를 가르며 보령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올라탔다. 목적지는 일단 전남 신안군 압해면 송공여객선터미널.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기점도와 소악도를 가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다도해의 수많은 섬 가운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고 외딴 다섯 개의 섬이 있다. 바로 대기점도와 소기점도, 소악도와 진섬, 딴섬이다. 다섯 개의 섬은 노둣길이라 불리는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다. 노둣길로 하나 된 섬을 일컬어 ‘기점·소악도’라 부른다. 썰물 땐 하나의 섬처럼 오갈 수 있지만, 밀물 때는 노둣길이 잠겨 다시 다섯 개의 섬이 된다.
3. 기점·소악도는 갯벌이 드러난 바다 외에는 눈을 둘 곳이 없다. 매력이 없다.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섬이 변하고 있다. 다섯 섬에 열두 개의 작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열두 개를 잇는 길을 걷고자 섬에 오고 있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생기면서 이름도 한국의 산티아고, 아니 ‘섬티아고’로 변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조성사업으로 시작한 순례자의 섬은 대기점도에서 소기점도, 소악도와 진섬까지 이르는 12㎞의 길을 순례길로 정하고, 이들 섬에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국내·외 뛰어난 설치미술가 10명이 참여해 만든 두 평 남짓한 작은 예배당은 각기 다른 모양과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작은 선착장, 언덕, 마을 어귀, 갈림길에서 섬의 풍광과 어우러진 채 12km의 길을 묵상하게 한다. 누군가에게 기도처일 수도 있지만, 쉼터일 수도 있고, 홀로 찾은 이들의 고독을 맡기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
4. 보령을 떠난 지 30여 분이 지날 즈음, 바다 상황이 궁금해서 여객선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출항 시간인 오전 9시 40분에 정상적으로 운항이 가능한지 묻는 순간, 사람은 그저 계획만 세우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병풍도 선착장 공사로 배는 12시 20분에 떠난다는 것이었다. 새벽 5시부터 서두른 길이었는데 기다림이 풍성하게 늘어났다. 배를 놓친 것보다는 천배 만배 낫지만, 이 기다림을 어떻게 할까?
고민도 잠시, 가는 길에 있는 영광 백수해안도로로 잠시 방향을 틀었다. 조기 말리는 냄새를 맡으면서 백수해안도로에 올라서는 순간, 계획이 틀어졌다고 노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는 길도 반드시 이 길로 오리라. 그때는 일몰을 곁에 두고 지나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송공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5. 섬은 보물이다. 여객선에서 보는 섬들은 빛나고 있었다. 여러 섬을 쉽게 갈 수 있는 보령이 참 좋은 곳이라는 것을 여기 신안 앞바다에서 새삼 깨닫는다. 바람 불면 파도에 잠길 것 같은 작은 섬은 온통 유채꽃밭이다. 하늘하늘 물결 따라 노랗게 흔들거린다. 엄청난 갯벌이 펼쳐져 있다. 배는 갯벌 사이에서 씩씩하게 잘도 간다.
드디어 대기점도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하고, 파란 하늘 배경으로 첫 번째 집인 ‘베드로의 집’이 오직 하얗고 파랑만 드러내며 당차게 그 위에 서 있다. 이미 그림이다. 저마다 카메라(핸드폰이라도)를 챙겨 든다. 사진을 찍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이미 내 마음에 인화돼 버렸다. 아, 앞으로 얼마나 설레며 사진을 찍어야 할까? 그렇게 첫발을 디뎠다. 종을 한 번 쳤다. 시작이다.
6. 섬티아고 길은 12km지만, 실제로는 다시 돌아오는 길도 있어서 16km 이상이다.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두 번째 집인 ‘안드레아의 집’, 세 번째 집인 ‘야고보의 집’, 네 번째 집인 ‘요한의 집’, 다섯 번째 집인 ‘필립의 집’,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여섯 번째 집 ‘바르톨로메오의 집’, 인연의 집이라고 불리는 일곱 번째의 집 ‘토마스의 집’. 여기까지가 첫날 걸어간 곳들이다. 네 번째 집인 '요한의 집'은 먼저 천국으로 간 아내를 기리는 할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고, ’바르톨로메오의 집’은 공사 중이라고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물 위로 접근하는 길이 조만간 만들어질 것 같다.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살짝살짝 부는 바람을 맞으며 꽃 잔디 길도 걷고, 유채꽃 길도 걷고, 염소가 풀 뜯는 길도 걷고, 노둣길 위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바다에 둘러싸여 외로운 것이 섬이라지만 기점·소악도 사람들은 노둣길을 통해 그들의 그리움을 만남의 기쁨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인연의 길로 만들었다. 그렇구나. 순례는 인연을 만드는 일인가 보다. 신과 관계를 돌아보고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고…
7. 기점·소악도는 해발 8~45m 정도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기점(奇點)은 "기묘한 섬 모양"이라고 뜻이고, 소악(小岳)은 높은(?) 산이 거기 있어 소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섬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 있는 곳이긴 하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분들이 봤을 때 약간의 높낮이를 유지하면서 차분히 걷게 만드는 이 길을 섬티아고로 불러도 괜찮다고 하지 않을까?
소기점도 선착장에서 10여 분 거리에 예약해 둔 ‘순례자의 섬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일곱 번째의 집인 ‘토마스의 집’에서는 5분 이내의 거리이다. 큰 방 두 개가 숙소인데, 남녀로 나뉜 방에는 2층 침대 4개가 있다. 그러니까 한 방에 8명이 들어갈 수 있다. 따뜻한 물이 피로를 씻겨주고, 정갈한 게스트하우스 식당에서는 섬 맛을 즐길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는 마을 주민들이 마을기업인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직접 운영하고 있다. 마침 새로 부임한 사무장이 조합원들에게 인사 겸 음식을 대접하는 날이었다. 시인인 사무장이 낭송한 시 한 편을 들을 수 있었고, 학춤 전수자가 와서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춤사위를 날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8. 섬은 밤도 깊다. 짱뚱어도 집으로 들어가고, 일몰 붉은빛도 갯벌에서 사라지면 들리는 것은 잔잔한 파도 소리뿐. 오늘은 별 하나 잠시 머무르다가 그마저 돌아가니 언제 이렇게 조용한 지구인이 될 수 있을까? 낯선 어둠이 행여 잠을 설치게 할까 걱정했지만 그저 걱정일 뿐, 섬의 포근함에 묻히니 아침의 질감을 한참 지나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미 노둣길은 물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내 후, 젖은 몸을 말리고 있다. 오늘은 아무도 걷지 않은 노둣길 사진 몇 장을 담고 다시 걸을 준비를 했다.
9. 작은 교회를 지나다 보니 그 옆에 카페가 있다. 이름이 ‘쉬랑께’. 재밌다. 다음엔 이 카페에서 꼭 쉬고 가야겠다. 노둣길 건너기 전에 휘돌아 가는 길을 따라가니 아홉 번째 집인 ‘작은 야고보의 집’이 보인다. 프로방스풍의 아름다운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이 집은 프랑스 작가인 장미셀과 스페인 작가인 파코의 작품이다. 내부 공간이 다른 곳보다 편히 쉴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벽을 기대고 앉아본다. 등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이웃에게 내 등을 맡길 수 있다면 참 좋은 사이일 것이다. 나도 시원하고 이웃도 시원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통하지 않아서, 혹은 오해해서, 아니면 내 욕심을 더 내세우다가 서로 어려운 길을 돌아서 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등을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하다가 서로 꽉 막힌 상태가 되면 시원한 세상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야고보의 집은 등을 맡길 수 있어서 행복하다.
10. 다시 노둣길을 건넌다. 그곳에 열 번째 집인 ‘유다의 집’이 기다리고 있다. 뾰족지붕이 오히려 부드럽다. 하얀색이 기다렸다는 듯이 품어준다. 저절로 배낭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여기는 소악도 노둣길 삼거리다. 삼거리 길은 예나 지금이나 쉬어가는 곳이다. 어차피 ‘가룟 유다의 집’까지 갔다가 다시 여기로 와야 한다. 바로 옆에 소악도 선착장이 있다. 송공항으로 가는 배를 여기서 타야 한다. 이곳은 쉼터다. 하얀 집 앞 벤치에 앉아서 건너편 게스트하우스를 바라본다. 커피 한 잔만 있으면 이렇게 좋은 곳은 없다.
사람들은 왜 이곳에 올까? 이미 기점·소악도는 예배당 순례길이 아니다. 섬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반영해서 열두 곳에 작은 예배당을 만들었지만, 특정한 사람들만의 장소는 벗어났다. 노둣길을 통해서 소통의 기쁨을 누리고, 걸으면서 나를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내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하는 곳이 되었다. 아마, 저마다 생각으로 오겠지만 돌아갈 때는 내가 내려놓은 것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이다. 돌아보니 그렇다.
11. 이제 열한 번째 집인 ‘시몬의 집’으로 간다.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니 다시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이 섬에서는 열두 번은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다. 모래사장을 건너 열두 번째 집인 ‘가룟 유다의 집’으로 간다. 다섯 번째 섬으로 들어섰다. 밀물이 들면 바라봐야만 할 섬. 지금은 부드럽게 걸을 수 있다. 푸른 하늘이 고맙다. 열두 번째 집에 다다르니 기도가 나온다. 이제 순례길을 마치니 이후로 이 길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도 복을 내려주소서. 그리고 종을 쳤다. 열두 번… 순례를 마치는 종이다.
돌아보니 섬이 거기에 있었다. 산티아고 들판보다 더 아낌없이 길을 내줬다. 작은 섬에서 산티아고 수백km의 길처럼 사람들이 걸었다. 서로 통하는 길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살기 어렵다고 한다. 코로나 19 이후 시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우리가 시원한 세상을, 함께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가 막힌 세상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 안에 서로 통하는 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
12. 소악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보령으로 간다. 보령의 섬도 걸어보고 싶다. 가야 할 길이 보인다. 우리 삶이 순례길이다. 언제가 이 길의 끝에 서겠지. 그때 돌아보면서 웃고 싶다. 아, 여기까지 잘 걸어왔구나. 함께 걸은 아내와 늘 봐도 반가운 사람들과 순례를 마치는 종을 치면서 삶의 노둣길 위에 던진 돌 하나하나를 헤아릴 수 있기를…
내려 올 때 다짐대로 다시 백수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일몰이 펼쳐진다. 바다가 아련하다.
노둣길.. 또는 노두길은 가까운 섬들이 '썰물 때 건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길'입니다.
신과 관계를 돌아보고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 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