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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21일 신앙의 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마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제 가버나움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내려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장 짧은 도표로 만든다면,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그 기간을 보통 3년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길게 잡아서 대략 2년여, 짧게 잡아서 1년 남짓으로 봐야합니다. 그의 공적 삶은 너무 짧았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역사와 로마역사에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 역사에 기록될 만큼 주목을 받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대에도 정말 크고 놀라운 일을 하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등, 이스라엘을 쥐고 흔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의 진술이 모두 거짓말이라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것이지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진술은 죽은 것이라면 신앙적인 진술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만으로는 의미 있는 일들이 전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만 진리를 진리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신앙이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일어난, 너무 평범하여 유대와 로마의 역사가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자 없었던 예수 사건의 구원론적 힘과 깊이를 폭로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마가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제 가버나움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내려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장 짧은 도표로 만든다면,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가시어 십자가에 처형당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그 기간을 보통 3년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길게 잡아서 대략 2년여, 짧게 잡아서 1년 남짓으로 봐야합니다. 그의 공적 삶은 너무 짧았습니다. 그 짧은 기간에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역사와 로마역사에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 역사에 기록될 만큼 주목을 받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당대에도 정말 크고 놀라운 일을 하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기도 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등, 이스라엘을 쥐고 흔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의 진술이 모두 거짓말이라거나 과장된 것이라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것이지 사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진술은 죽은 것이라면 신앙적인 진술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사실만으로는 의미 있는 일들이 전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만 진리를 진리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공동체의 신앙이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에게 일어난, 너무 평범하여 유대와 로마의 역사가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일 필요조자 없었던 예수 사건의 구원론적 힘과 깊이를 폭로했습니다.
'메시야'라는 신적 고양과의 비교에서
그 바란스가 깨질 수록
신비는 깊어만 갑니다
우리의 신앙이
역사의 논외 지역에 존재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과
긴 시간의 논쟁 끝에 갖춰져간
교리의 토대위에 거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초라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바로 그러한 것이,
하나님은 어떤 메카니즘 안에서
손쉽게 재단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오히려 명증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