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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5일 케리그마(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는 걸 일단 전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은 우리의 모든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종말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의 실체를 우리가 온전히 인식하려면 세상의 마지막이 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완벽하게 해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우주론적 차원에서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일어났던 그런 생명 사건을 우리가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으로 현현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복음서도 그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마술이라고 한다면 세부적인 묘사를 했겠지요. 복음서에는 그런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선포만 있습니다. 그런 선포 안에 ‘사흘’이라는 숫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숫자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구약성서의 영향입니다. 부활경험을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한 결과가 바로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사흘 후의 부활’이 후대의 삽입이라는 사실관계가 정말 옳은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겠군요. 신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이런 짧은 묵상의 글로 담기도 힘드니까요.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의 뒷부분으로 넘어가면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것이 어떤 실증적인 사실보도가 아니라는 걸 일단 전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은 우리의 모든 인식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종말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의 실체를 우리가 온전히 인식하려면 세상의 마지막이 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예수님의 부활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단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완벽하게 해명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우주론적 차원에서 오직 예수님 한 분에게만 일어났던 그런 생명 사건을 우리가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과 그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으로 현현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복음서도 그것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마술이라고 한다면 세부적인 묘사를 했겠지요. 복음서에는 그런 묘사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선포만 있습니다. 그런 선포 안에 ‘사흘’이라는 숫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숫자에 도달하게 된 이유는 구약성서의 영향입니다. 부활경험을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한 결과가 바로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