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126) 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진실로는 헬라어 아멘의 번역이다. 아멘은 trulyindeed라는 뜻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영생에 이르는 데에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라는 뜻이다. 다리를 건널 때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행기를 탈 때도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 관계에서도 믿음이 중요하다. 부모를 향한 자식들의 믿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믿음, 친구와 동료를 향한 믿음이 그 관계를 살린다. 믿음은 믿을만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근거가 없으면 믿음은 곧 광신으로 떨어진다. 사이비 이단을 추종하는 이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근거가 객관적인 수치로 계산되는 게 아니라서 믿음과 광신을 구분하기 어렵다. 자신이 믿는 대상이 어떤 근거에서 진리인지를 변증할 수 있을 때만 그 믿음은 살아남게 될 것이다.

요한 6:47절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은 물론 예수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 예수와 생명, 또는 예수와 영생은 요한복음이 반복해서 언급하는 개념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단절된 생명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들린다. 생명이 단절되었다거나 회복되었다는 말이 실질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은 먹고 마시고 숨 쉬면서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생명은 예수를 믿어도 계속되지 않는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도 아니다. 죽음 다음에 천당에 가서 영원무궁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너무 멀게 느껴진다. 영생은 하나님의 통치다.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아는 분량만큼 영생의 분량을 경험할 수 있다


[레벨:23]브니엘남

2019.06.05 06:48:55

다(리)를 건널 때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6.05 22:02:21

고쳤습니다.

[레벨:18]부스러기은혜

2019.06.05 09:28:41

구원 ,영생 ,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생각이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는한, 예수따름이 미망에 빠진채 평생 나이브한 신앙관에서 벗어날 길이 없겠구나.. 싶습니다

지난주 설교문에서 그러셨죠?
눈 앞에 닥친 일상이 늘 발등의 불로 여겨지는건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인식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잠시잠깐 한 눈을 팔면 세상것은 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기만 해보이고,
그저 내 발등만 쳐다보며 살게 할만큼 직면한 일은
언제나 화급해보이고,
이 와중에 타는 목마름까진 아니어도 온전한 믿음 얻기를 늘 구하지만 가시적인 응답은 요원해보이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그 백척간두의 절박함에서 찾은 '구원'은 어떤 구원이었을까?
왜 다른 표현은 놔두고 누가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구원'이란 어휘를 썼을까?

구원에 대한 갈급함속에
예수를 찾은 부자청년처럼,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처럼
그날 빌립보 감옥에서 그 간수도
구원에의 영적인 갈급함과 진정성의 임계량이 가득 채워져가던

그 타이밍에 절묘히 그 사건을 만났기때문일까?
나도 지금 그런 노정가운데 가고 있는것일까?

그렇게 자문해보았답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6.05 22:11:12

예, 제가 보기에도 부스러기 님은 기독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맛보고 싶어서

예수를 찾아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간 어떤 부자  청년과 비슷해 보입니다. ㅎㅎ

그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최선이겠지요.
실제로 제자로 나서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니까요.

저는 그 부자 청년과 제자 사이 어느 자리에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정말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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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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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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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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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3월24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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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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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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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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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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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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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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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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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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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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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광야 (1), 3월29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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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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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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