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29)

조회 수 915 추천 수 0 2019.10.09 20:04:44

한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피투적 존재로서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완벽한 대답을 바란다는 것은 속된 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져 보고 모든 실체를 말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작은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들만 어렴풋이 짐작하며 살아갈 뿐이지 이것이 전체적으로 어떤 근원과 목표를 가졌는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질문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라는 대답으로 설명이 충분한 것일까? 솔직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보충해 보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생명형식과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생명형식의 세계가 도래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유 없는 고난은 흡사 수술을 받는 중환자의 경우와 비슷해서, 현재는 고통으로 견딜 수 없지만,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면 그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고 훨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아무런 고난과 아픔 없이 사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시작된다면 그때는 여기서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세계에서는 그 이전의 상대적인 세계가 별 큰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선취되었다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이유 없는 고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십자가가 비록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찬 사건이었지만 부활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로 지양된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이유 없는 고난이 언젠가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고난의 미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결국 극복되어야 할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록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의미로 지양되는 날을 향해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신정론 항목은 졸저 <세상은 마술이다>의 내용을 기초로 한 것이다.)

 

예화- 박완서 선생이 겪은 참척의 고통

박완서 선생의 남편은 50대 나이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죽은 지 3개월만에 25세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당시 아들은 의과대학교 레지던트이자 연극 연출가였다고 한다. 박완서 선생은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산의 분도 수녀원에서 하나님께 따지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고 그 참척의 고통을 극복했다고 한다. 완전한 극복은 불가능했겠지만 일단 그 상황은 버텨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면 안 되나?”로 바뀌었다. 그 당시의 경험을 소설로 엮어낸 책이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고, 수필 형식으로 낸 책이 <한 말씀만 하소서>이다.


14절은 고난을 받으면 오히려 복 있는 자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나? 현실성이 있나? 이런 문장은 마 5장의 팔복을 연상케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다. 이렇게 8가지 항목이 나열된다. 5:12절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 기대할 일이 없는 사람은 강력하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 이 세상이 완전히 변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둔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다. 가능하면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떤 불행이나 고난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세상에서 기대할 일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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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15]

  • 200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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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0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 200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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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0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 200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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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1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

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4]

  • 200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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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1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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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2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 200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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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2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복음 (1), 3월23일 [7] [2]

  • 200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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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3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1>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같은 이름의 교단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복음’을 간판으로 내건 교단도 있습니다. ‘복음교회’가 그 교단입니다. 복음교회는 그렇게 보수적이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진보적이지만도 않은, 비교적 건전한 교단입니다. 복음을 간판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복음교회보다 훨씬 더 복음이라는 단어와 밀착된 교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가 그 교단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회도 나뉘어졌기 때문에 지금 제가 정...

복음 (1), 3월23일 [6]

  • 200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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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3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1>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같은 이름의 교단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복음’을 간판으로 내건 교단도 있습니다. ‘복음교회’가 그 교단입니다. 복음교회는 그렇게 보수적이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진보적이지만도 않은, 비교적 건전한 교단입니다. 복음을 간판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복음교회보다 훨씬 더 복음이라는 단어와 밀착된 교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가 그 교단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회도 나뉘어졌기 때문에 지금 제가 정...

복음 (2), 3월24일 [4]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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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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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 조회 수 8931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 조회 수 4354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 조회 수 9602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 조회 수 4403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 조회 수 9531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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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 조회 수 9028

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 조회 수 4223

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 조회 수 8677

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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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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