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30)

조회 수 1124 추천 수 0 2019.10.10 21:25:33

소망의 이유

베드로 사도도 고난의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고난을 피할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매우 역설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광신자처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다. 고난과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 가운데 있다는 게 중요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마음이 상해도 심각한 정도로 낙심하지는 않는다. 집에 들어가면 더 행복한 일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소망은 이미 1:3절에 나온다. 거기서는 산 소망으로 묘사되었다. 그 소망은 예수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이 소망의 이유다. 예수 부활이 왜 소망의 이유인지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것이 변증의 책임이다.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면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일종의 인문학적 해석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소망이 예수 부활을 통한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궁극적인 생명 경험이다. 궁극적인 생명 경험이라는 하나님 경험이다. 하나님이야말로 궁극적인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 경험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는 하나님 경험이 다양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모세의 하나님 경험,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만 보자.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6:1-8절에는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보도는 읽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거기서 묘사된 이야기를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나온 것을 허황하다고 무시하기도 찜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만 그런 건 아니다. 근원적으로 성경의 세계는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선 경험과 비슷해서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일단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따라가 보자.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특별한 현상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기가 실제로 본 것처럼 묘사했다. ‘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 하나님이 왕처럼 보좌에 앉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화가는 그런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 옷자락도 당연히 상징이다. 번제를 드릴 때는 연기가 나온다. 성전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를 이사야가 주의 옷자락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상한 모양의 스랍들이 나타난다. 날개가 여섯이다. 날개 둘로는 날고, 다른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발을 가렸다. 어둠이 가득한 성전에 앉아서 제단의 불빛을 보면 스랍들로 보일지 모른다. 사람은 특별한 장면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다.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도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받는다. 3절에 따르면 스랍들이 찬송을 부른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는 찬송 소리로 인해서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 안에 연기가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사야는 못 볼 것을 본 셈이다. 일종의 천기누설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신을 본 자는 죽는다. 틀린 말이 아니다. 상대적인 존재인 인간은 절대적인 존재인 신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없는 거나,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동시에 브라질에 나타날 수 없는 거와 같다. 이사야는 이어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깊은 밤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거룩한 힘에 휩싸였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 떨기나무의 불꽃 현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고, 이사야 역시 성전 안의 불빛과 연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앞에서 짚은 아브라함도 연기를 뿜는 화로와 타는 횃불 현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도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나타났다(2:3). 이들의 하나님 경험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불()이다.

인간은 구석기 때부터 불을 사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연적인 불을 사용하다가 차츰 불을 피울 수 있는 기술을 발견했을 것이다. 불의 발견이야말로 인간 문명의 초석이다. 그들이 처음 자연적인 불을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지는 상상이 간다. 둘째 딸이 두 돌이었을 때의 경험이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케이크에 꽂은 초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주인공인 둘째 딸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났다. 딸의 감각에 처음으로 불이 들어온 것이다. 불은 완전히 이질적인 사물이다. 다른 것을 태움으로써만 존재하는 사물이다. 태울 게 없으면 사라진다. 그러니 불의 실체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바람 현상과도 비슷하다.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불은 흔적이라도 남기지만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사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느끼는 것으로부터 신 경험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물의 경이로움은 하나님의 시원적 능력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사물들은 이런 시원적 능력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우리 집 마당의 매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매화가 피었을 때 벌이 꿀을 얻느라 매화 안으로 들어가서 매화의 수정을 일으킨다. 벌이 없다면 매실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벌이 그 시간에 맞춰서 매화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 자체가 놀랍고 신비롭고 엄청난 사건이다. 사소해 보이는 사물에 얽힌 사연을 그 깊이와 넓이에서 파고 들어가면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로운 게 없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니 세상 안에 하나님이 내재한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런 입장을 일반적으로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한다. 단순히 범신론(Pantheism)과는 구분되는 이런 입장에 나는 동의한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물과 자연 현상의 깊이에서 신적인 것을 경험하는 것은 결코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벨:23]브니엘남

2019.10.11 07:50: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시어 산 소망을 얻게 하심으로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 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부터 5절까지의 문맥을 보면 산소망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4절)이고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5절)인 영광의 소망(골 1:27), 즉 영화가 아닌가요. 그렇게 읽으면 안 되나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10.11 22:33:28

예, 브니엘남 님의 견해가 옳습니다. 그건 본문이 말하는 것이니 달리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저의 설명은 유업, 구원, 영광, 영화 등등으로 묘사하는 내용들이

결국은 하나님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영광을 소망한다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영광은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그 하나님의 현존에서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 거지요.

[레벨:23]브니엘남

2019.10.12 07:32:23

     '소망은 이미 1:3절에 나온다. 거기서는 산 소망으로 묘사되었다. 그 소망은 예수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즉 예수의 부활이 소망의 이유다. 예수 부활이 왜 소망의 이유인지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에 알려야 한다. 이것이 변증의 책임이다.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려면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개념이 필요하다. 일종의 인문학적 해석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소망이 예수 부활을 통한 거듭남이라고 한다면'이라고 하셔서 마치 거듭 남이 산 소망인 것 같이 들려서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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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3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성곽은 144 규빗이라고 합니다. 1 규빗이 대략 50cm 정도니까 72m가 되는 셈입니다. 성곽, 즉 성벽의 전체 둘레는 물론 아니고, 높이이거나 두께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앞 구절에서 성체의 높이가 2,304km라고 했으니까 72m 높이의 성벽은 너무 낮아 보입니다. 144규빗은 성벽의 두께라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정도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두께입니다. 옛날에는 철근 콘크리트 없이 순전히 기하학적인 기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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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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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9 21: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열두 문이 동서남북 사방에 나뉘어 있습니다. 이런 분류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거룩한 성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주님의 몸이며 거룩한 성이면서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사방을 향해서 닫혀 있는 게 아니라 활짝 열려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밀의 종교가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려는 보편 종교의 길을 걸었...

계 21:12 [4]

  • 2024-04-02
  • 조회 수 165

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8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새 예루살렘인 거룩한 성에 대한 설명이 약간 복잡해집니다. 묵시적 상상력에서 표상된 그림같이 멋진 성입니다.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올만한 모습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에 열두 문이 있다고 합니다. 성곽은 성벽을 가리킵니다. 열두 개는 많기는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성을 들락거리는 성문은 숫자가 적을수록 좋습니다. 관리하기에 편하...

계 21: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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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7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1절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묘사됩니다. 앞에서 저는 ‘어린 양의 아내’라는 표현을 근거로 본문이 말하는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11절 이하에 나오는 묘사는 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이 이 대목에서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최후의 심판 이후에 재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한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혹은 종말 이후의 세...

계 21:10

  • 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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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6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겔 40:2에서도 에스겔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상한 성읍 형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높은 산은 영적인 경험이 일어나기에 적당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모리...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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