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31)

조회 수 1163 추천 수 0 2019.10.11 20:12:26

상투스!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는 스랍들의 찬송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이런 구절을 교회당에서 성가대가 부르는 합창을 직접 듣는 거와 같은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이사야의 귀에만 들린 합창 소리다.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합창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들리는 영적인 합창이다. 시인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작곡가가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거와 같다. 오늘 우리도 이사야의 영적인 경험을 이해한다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의 하나님 경험도 기본적으로는 이들의 하나님 경험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거룩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이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을 설명할 때 누미노제, 즉 거룩한 두려움을 짚었다. 거기서는 주로 두려움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여기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존재 방식과 전혀 다르다는 데에 있다. 바르트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절대타자(totaliter aliter). 하나님은 우리와 유사한 존재가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기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가 그를 규정할 수 없고 범주화할 수 없다. 흔히 말하듯이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은 초월한다. 제약받는 자와 초월하는 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서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새처럼 공중을 날지 못한다. 사람과 새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놓인 셈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완전히 구별된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종의 불가지론이 개입된다. 이런 문제는 서로의 주장이 얽혀서 따라가기 복잡하니까 길게 끌지 말자. 하나님 인식과 경험에서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주장이 기독교 정통의 입장이다. 그 주도권을 가리켜서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의 계시로 우리는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세상 이치를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은 진리의 관점에서 가장 수준이 낮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사랑의 실증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구별된다는 말을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낯설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곧 낯설다.’라는 말이다. 낯설기에 거룩하고, 거룩하기에 낯설다. 이런 점에서 가장 낯선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사야의 환상에 나오는 스랍은 이상한 생물이다. 천사도 이상한 생물이다. 모두 낯선 생물들이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을 직접 표현할 수 없으니까 우리의 익숙한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상인 스랍이나 천사처럼 낯선 생물들을 등장시켜서 간접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핵심은 절대적으로 낯선 경험이다. 갑자기 외계인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나님에 대한 낯선 경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종종 나타난다.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이 되게 하여 히브리 사람들은 건너게 하고, 파라오 마병들은 바닷물에 수장시킨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리암의 노래를 들어보자.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2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존재다. 그런 일들을 그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다. 예수 사건 앞에서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고 한다. 다 같은 이야기다. 하나님은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낯선 존재라는 말이다.

낯선 존재나 낯선 능력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악한 방식으로 낯선 것들에게는 거룩하다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사탄이나 마귀의 힘을 빌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선한 능력과 악한 능력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양쪽 모두 놀랍고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걸 구분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영적인 통찰력의 심화가 최선이다. 영적인 통찰력이 깊어지려면 낯설지만 선한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좋은 시를 많이 읽고 공부한 사람만이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싸구려 시를 구분할 수 있는 거와 같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낯섦을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두지만 낯설다는 경험은 거룩하다는 경험과 같다. 낯선 경험과 거룩하다는 경험의 대상은 어떤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깊이에 들어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스랍들을 경험했지만, 우리는 강과 산과 사막에서도 스랍들을 경험할 수 있다. 나무와 꽃이 스랍이며, 아침 안개와 구름이 스랍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유심히 보면 낯설지 않은 게 없다. 즉 거룩하지 않은 게 없다. 시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런 걸 잘 살피면서 놀라워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이다. 이시영 시인의 시집 사이에서 3행으로 된 시 저 잎새 하나를 읽어보겠다.

 

나뭇잎 하나에도 신의 강렬한 입김은 스며

바람 불지 않아도 저 잎새 밤새도록 찬란히

은빛 등을 뒤집고 있으니

 

시인에게는 나뭇잎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 그것 자체가 낯설고 거룩해서 신의 입김이 스며들었다고 본 것이다. 일본 고유의 단시 하이쿠에 이런 시가 있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간노 다다모토). 사물에 대한 이런 시각 없이 우리는 성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사물의 깊이를 느끼고 생각할 줄 아는, 그래서 세상을 새롭고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게 경험하는 신자들은 목사들의 상투적인 설교에서 아무런 영적 감동도 느끼지 못한다. 한편으로 당연하고, 다른 한편으로 안타깝다.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항목은 졸저 <목사 구원>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21세기 현대인들의 희망은 유물론과 휴머니즘을 토대로 한다. 물질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거듭남이 왜 참된 희망의 근거인가에 관해서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깊이 들어가고 그 신앙이 실제 교회 생활과 세상살이에서 현실로 자리를 잡도록 노력하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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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5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 나무가 하나의 품종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열매를 맺는 나무를 포괄하는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생명 나무 열매를 먹고 살겠지요. 매력적입니다. 과일만으로도 영양 공급이 충분할 테니까 말입니다. 육식을 즐기는 분들은 에덴동산도 그렇고 여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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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4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우리는 이제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까지 왔습니다. 22장에서도 요한은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를 통해서 묵시적 환상을 경험합니다. 생명수의 강은 창 2:10-14절 내용과 연결됩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에덴동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이 아니라 여러 줄기의 강이 나옵니다. 첫째 줄기의 강은 비손이고, 둘째는 기혼이며, 셋째는 힛데겔이고, 넷째는 유브라데입니다.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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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3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7절에 다시 생명책 이야기가 나옵니다.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못한 자들은 이 세상의 악한 권력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계 13: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들은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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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2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6절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영광(δόξα, glory)은 요한계시록에 흔하게 나오는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붙일 수 없는 개념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완전히 변화된 세상이라서 사람도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영광...

계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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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1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5절 문장이 약간 이상합니다. 거룩한 성에는 밤이 없어서 낮에 성문을 닫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문은 보통 밤에 닫지 않습니까. 낮에는 원래 열어두는 거고요. 밤에도 성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해야 자연스러운 표현인데, 위 구절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아닙니다. 아예 문이 필요 없겠지요.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려는 ...

계 21:2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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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0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4절의 표현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왕이 각각의 영광 가운데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에 던져질 자들은 모두 던져진 이후의 일이니까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자들에게 ‘자기...

계 21:23

  •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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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9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은 해가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세상을 내다봅니다. 빛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 60:19-20절에서 이에 관해서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

계 21:22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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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8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2절에는 아주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성전 하나쯤 있어야 거룩한 성이 빛나 보일 텐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종교 건물이 없는 곳을 거룩하다고 이름 붙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요한이 본 거룩한 성은 그것 자체로 완벽하기에 성전은 없어도 ...

계 21:21 [2]

  • 20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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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7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12절에서 언급된 열두 문이 21절에서 다시 소개됩니다. 각각의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있습니다. 진주 한 알이 박혀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문 전체가 진주로 되어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문을 만들만한 크기의 진주는 세상에 없습니다. 문이 진주 모양을 했다는 뜻인가요? 그냥 편하게 진주로 된 문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문에 이어지는 길이 나옵니다. 길은 ‘맑...

계 21:20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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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6 21:20 다섯째는 홍바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다섯째부터 열두째까지 당시의 모든 보석이 열거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석들이군요. ...

계 21:19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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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5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각각 기록된 열두 기초석도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19절에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벽옥,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비취옥)입니다. 옥수(玉髓)는 낯선 단어인데, 보석의 일종으로 보면 됩니다. 정말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요한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본 것 중에서, 그리고 상상할 수 ...

계 21:18

  •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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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4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8절에 다시 벽옥과 정금(순금)이 나옵니다. 요한이 어디서 이런 건축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요? 사람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이 에로스처럼 강합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빛나는 건축물을 향한 욕망 말입니다. 그런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빛내고, 더 근본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아내나 연인을 위해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물을 짓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

계 21:17

  •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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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3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성곽은 144 규빗이라고 합니다. 1 규빗이 대략 50cm 정도니까 72m가 되는 셈입니다. 성곽, 즉 성벽의 전체 둘레는 물론 아니고, 높이이거나 두께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앞 구절에서 성체의 높이가 2,304km라고 했으니까 72m 높이의 성벽은 너무 낮아 보입니다. 144규빗은 성벽의 두께라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정도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두께입니다. 옛날에는 철근 콘크리트 없이 순전히 기하학적인 기술로...

계 21:16 [9]

  •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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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2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거룩한 성에 대한 묘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위 16절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봅시다. 거룩한 성은 정육면체이거나 피라미드 모양의 탑입니다.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각각 12,000 스다디온이라고 합니다. 1스다디온은 192m라고 하니(계 14:20) 자그마치 각각의 길이가 2,304km에 해당하는 크기입니다. 저런 크기의 성 앞에서는 높이가 대략 ...

계 21:15 [2]

  •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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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1 21: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자를 가졌더라 요한에게 말하는 자는 앞서 계 21:9절에 나왔듯이 일곱 천사 중의 한 천사입니다. 그 천사가 성과 문과 성벽을 측량하려고 합니다. 보통 자가 아니라 금으로 된 자막대기입니다. 요한은 거룩한 성이 얼마나 고귀한지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중입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해도 재창조될 새 예루살렘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습니다. 애벌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비의 세계를 정확하게 경험할 수 없...

계 21:14 [2]

  • 20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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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0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2절에는 성곽에 열두 문이 나오는데, 여기 14절에는 성곽에 열두 기초 석이 나옵니다. 열두 문에는 열두 지파 이름이 기록되었고, 여기 기초석(주춧돌)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전통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 공동체의 열두 사도에게 이어졌다는 뜻으로 봐도 좋겠지요. 이런 표현은 상징입니다. 열두 지파나 열두 사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

계 21:13 [2]

  • 20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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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9 21:13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열두 문이 동서남북 사방에 나뉘어 있습니다. 이런 분류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거룩한 성이 사방으로 통한다는 뜻이 아닐는지요. 주님의 몸이며 거룩한 성이면서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사방을 향해서 닫혀 있는 게 아니라 활짝 열려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밀의 종교가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려는 보편 종교의 길을 걸었...

계 21:12 [4]

  •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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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68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새 예루살렘인 거룩한 성에 대한 설명이 약간 복잡해집니다. 묵시적 상상력에서 표상된 그림같이 멋진 성입니다.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올만한 모습입니다. 크고 높은 성곽에 열두 문이 있다고 합니다. 성곽은 성벽을 가리킵니다. 열두 개는 많기는 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성을 들락거리는 성문은 숫자가 적을수록 좋습니다. 관리하기에 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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