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36)

조회 수 1100 추천 수 0 2019.10.17 21:00:05

만물의 마지막과 기도에 대해서 말한 뒤에 본문은 이제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8).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하라(9). ‘원망 없이가 중요하다. 이게 쉽지 않다. 원망이 나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10절에서 은사를 말한다. 은사론은 고전 12장에 자세하게 나온다. 직책에 따른 은사가 있고, 기능에 따른 은사가 있다. 은사론에는 몇 가지 개념이 따른다. 첫째,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둘째, 모든 은사는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셋째, 은사의 독립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넷째, 은사의 목표는 섬김과 봉사다. 벧전 4:10절도 은사를 봉사라고 말한다. 목사도 은사이고 교사도 은사다. 성가대도 은사고, 주방일도 은사다. 모든 은사는 자기를 나타내는 기회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기회로 사용되어야 한다.

11절에는 두 가지 은사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하나는 말씀 은사다. 예언자, 복음 전파자, 교리교사 등이다. 이들은 다 말로 섬기는 자들이다. 오늘날 목사, 교회학교 교사, 신학대학교 교수 등이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교육의 내용과 방법론이 핵심이다. 기독교 교육에서도 이 두 요소가 중요하다. 문제는 그 내용이라 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 벌어진다. 말씀이 단순히 정보에 떨어지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 위험성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을 기술(테크닉)로 여기지 말고 예술(art)로 여겨야 한다. 기술자는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빨리 만들지만 예술가는 늘 새롭게 창조한다. 다른 하나는 봉사다. 여기서 말하는 봉사는 10절이 가리키는 일반적인 봉사가 아니라 구체적인 섬김을 가리킨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들이다. 이 봉사(디아코니아)는 케리그마, 디다케, 코이노이아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네 가지 기능의 하나였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공급하듯이 섬기라고 충고한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우리가 자선의 주체는 결코 아니다. 결국, 말과 행동이 모두 깊은 신앙에서 나올 때만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11절은 송영으로 끝난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권능이 영원히 함께하기를 찬송한다. 딤전 6:16절에는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높이고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할 때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단순히 고백에만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차원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런 삶은 겉으로 보면 매우 소극적으로 보인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자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이에게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신비주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무()로 돌리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물처럼 바람처럼 산다. 누가 인정하든 않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무위(無爲)의 차원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기에 소극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가장 적극적인 삶이 바로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바치는 송영의 삶이다. 자신의 피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사는 이런 송영의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아주 심하게는 송사에 떨어지는 일은 신앙의 근본이 훼손되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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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2019.10.18 12:17:04

오늘 말씀처럼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또 그런 삶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떠나지는 않는데, 

구습이 본성이 되어 합리화의 덪에 갇히곤 합니다.

수도자의 구도정진 영성은 아득하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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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9.10.18 22:45:44

저도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 실제로는 하늘연어 님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럴 때 최선은 아예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리는 겁니다.

무림 고수처럼 영적 훈련이 비상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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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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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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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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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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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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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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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3월24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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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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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3) 3월25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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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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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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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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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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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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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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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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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광야 (1), 3월29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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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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