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37)

조회 수 1146 추천 수 0 2019.10.18 20:13:44

412-19 고난 앞에서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정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교회의 당면 문제는 박해와 시련이었다. 2:18절 이하, 3:8절 이하에서 고난을 다루었다. 이제 4:12절 이하에서 다시 고난 문제를 다룬다. 여기서는 앞에서보다 더 적극적인 관점으로 설명한다. 고난을 참는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13절과 16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고난을 겪으면 피하려 최선을 다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걸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게 오늘날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우선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당시 기독교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상관없이 산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하나는 종교 박해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교회 나가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다. 시부모가 반대하니 교회에 나가기가 불편한 며느리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세대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사회 분위기가 기독교에 적대적이기에 기독교인이라고 나서는 일이 눈치 보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 숫자가 줄어드는 추세다. 특히 젊은 세대에는 이런 현상이 아주 뚜렷하다. 기독교가 사회에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이 아니라 21세기가 유난히 세속적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이런 현상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앙 문제로 인해서 고난을 겪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난이 없는 기독교인의 삶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 우리는 좀더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오늘의 기독교 신앙이 일종의 혼합주의(syncretism)에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면 교회는 기복주의에 물들었다. 하나님 신앙과 물신 신앙이 혼합된 것이다. 기독교는 세상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적응을 잘하는 중이다. 기복주의 신앙에 갇힌 사람은 가난과 고난을 배척하게 마련이다. 고난을 신앙적인 담론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팔복에 나오는 말씀을 추상화한다. 기독교 신앙이 가난 미학을 추구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기복주의에서 일어나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더불어서 연대하여 가난과 고난을 극복해나가려고 애쓰지 않고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미루는 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가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상황이 고난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말씀을 붙들고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고난을 절감할 것이다. 21세기가 노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박해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는 반기독교적이다. 로마 시대의 기독교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박해받았다고 한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일종의 맘모니즘인 자본주의에 의해서 박해받는다. 로마 시대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붙들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의 평화를 붙들고 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기독교는 경제성장 만능주의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을 외면하지 않는다. 경제 민주화의 목소리를 낸다. 여기서 크고 작은 고난이 발생할 수도 있다. 좁게는 교회 안에서도 고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억울한 오해를 받을 때 따지고 들지 않는다든지, 다른 이들보다 더 솔선해서 봉사하는 일들이 고난이라면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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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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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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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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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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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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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1), 3월23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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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3월24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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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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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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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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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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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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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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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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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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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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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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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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