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2), 3월24일

조회 수 9634 추천 수 112 2006.03.24 23:14:03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말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엑서더스,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이집트와 바벨론은 제국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국의 속성인 제국주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리의 준거를 자신에게만 한정함으로써 패권을 행사하는 힘이 곧 제국주의인데, 이집트와 바벨론은 전형적인 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는 바로 신(神)이었습니다. 약간이라도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제국과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올 겁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강력한 힘으로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나 할까요? 거꾸로 기독교 스스로 제국주의적 패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 면에서 제국주의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보면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는 자기가 극복해야 할 그 악한 힘을 자기 내부에 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둘째, 출애굽과 포로귀환은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을 보도하고 있는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제국을 하나님이 무력화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막강한 전투력을 확보하고 있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야훼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게 곧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구원이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그 구원 사건이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복음이 주로 정치, 사회적인 사건과 연결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칫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곧 정치적 해방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서읽기의 방향 착오입니다. 복음이 정치적으로 일어날 수는 있지만 정치적 해방이 곧 복음은 아닙니다.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보도하는 구약성서의 중심도 역시 그 정치적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있습니다. 엄중한 국제질서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제 신약성서는 복음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서 접근합니다. 신약의 정치적 배경도 역시 로마라는 제국이지만 신약의 복음은 더 이상 정치적 해방보다는 어떤 한 인격체와의 일치를 통한 궁극적인 해방을 선포합니다. 아마 신약성서는 구약이 그렇게 천착했던 정치적 해방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정치적 해방이 아무리 절실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일 수는 없습니다. 정치의 최종 목표인 복지의 극대화를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 한 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관한 질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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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4.16 09:34:33

록키 실베스터스텔론의 "데몰리션맨' 에 극대화된 복지사회가 나옵니다

[레벨:18]눈꽃

2008.10.30 18:00:30

오늘의 묵상! 많은것을 생각하게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확장해야하겠다는 욕망이 내용적인면에 제국주의이니까요....복음을 전해야할 교회는....내부에키우고 있는 셈이겠지요 "에서 교회에다가 에 저를 대입해봅니다 신약성서 공동체는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한 사건,한운명에서 복음의 실체를 발견했습니다 .... 복음의실체를 진정하게 생각해보았나요? 진지하게 생각해보란 말씀이지요? 해보다가 말다가 그냥 세월만보냈습니다 ..감사!

[레벨:18]은나라

2016.06.29 21:54:37

신약성서 공동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한 복음의 실체가 부활일텐데요..

문자 그대로의 부활이 아닌 전혀 다른 그 경험이 무언지? 그들의 경험과 지금 우리가 신앙을 통해 하는 경험과 같은지? 아님 다른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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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6.06.29 22:50:06

'예수의 부활은 종말론적 생명이

역사에 유일회적으로 선취된 사건이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무엇인지는

종말에 가서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서

예수 부활을 변증해야겠지요.

그게 신학이고 신앙이고 교회생활입니다.

완전하게 실증적으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니

인내하고 믿고 희망하며 기다려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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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44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당시 사람들은 천년을 세계 역사가 변하는 한 단위로 생각했습니다. 벧후 3: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시 90:4절입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천년을 날수로 계산하면 365,000일입니다. 하루와 천년은 비교 자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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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9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은 해가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세상을 내다봅니다. 빛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 60:19-20절에서 이에 관해서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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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8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8절부터 새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끔찍한 명령이 내립니다.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자’는 실제로 모든 사람을 가리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아마 후자겠지요. 어쨌든지 새들이 사람의 살을 먹는 풍경은 끔찍합니다. 우리가 볼 때 끔찍할 뿐이고 새들에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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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5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각각 기록된 열두 기초석도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19절에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벽옥,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비취옥)입니다. 옥수(玉髓)는 낯선 단어인데, 보석의 일종으로 보면 됩니다. 정말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요한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본 것 중에서, 그리고 상상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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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8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2절에는 아주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성전 하나쯤 있어야 거룩한 성이 빛나 보일 텐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종교 건물이 없는 곳을 거룩하다고 이름 붙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요한이 본 거룩한 성은 그것 자체로 완벽하기에 성전은 없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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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4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8절에 다시 벽옥과 정금(순금)이 나옵니다. 요한이 어디서 이런 건축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요? 사람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이 에로스처럼 강합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빛나는 건축물을 향한 욕망 말입니다. 그런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빛내고, 더 근본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아내나 연인을 위해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물을 짓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

계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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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0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4절의 표현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왕이 각각의 영광 가운데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에 던져질 자들은 모두 던져진 이후의 일이니까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자들에게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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