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조회 수 9550 추천 수 92 2006.03.27 23:03:18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실제로 말을 전해준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실제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이 입으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아니면 실제로 말하는 건 사람이지만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인가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이사야의 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글입니까? 이 질문을 단순화해 봅시다. 이사야의 글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유대교가 기원후 90년 얌니야 회의에서 구약의 거룩한 문서 중에서 39권을 자신들의 정경으로 결정한 사건에 의해서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경화 이전에는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또한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문서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신약성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준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간혹 설교하는 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오버하는 분들은 자신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실체를 본다는 말인지요. 삶과 죽음까지 포함한 궁극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죽음 이전에 한정되어 있는 인간이 직접 만나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직접 들려준 소리나 글로서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영적인 깊이에서 들여다보고 해석했습니다. 자기 민족이 처한 운명을 창조자이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거실 때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이겠지요. 이사야는 그런 영적인 귀가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바로 그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났으며,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 즉 예언자들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계시의 역사, 구원의 역사이겠지요. 그런 역사의 한 순간에 지금 우리의 삶이 걸려 있습니다.


[레벨:1]똑소리

2006.03.28 11:24:28

짧지만 명쾌한 글이어서
귀에 쏙쏙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런데 목사님!
또 궁금증이 제 안에서 발광을 하는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요
그리고 이를 근거로 목사님께서도 줄기차게 주장해 오셨구요.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도 없고 그렇기에 음성도 들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게 참 궁금하네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성서의 주장도
유대인들의 이런 신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도 같구요.
다른 고대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이 단지 자신들의 신, 야훼를 인간과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그런식으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내부에 존재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인간이
그런 신의식에 근거하여 갖는 공연한 공포심인지 궁금하군요.

성경에 보면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더군요.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데 그것도 안되니 미치겠고요.

어떤 사람이 성전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급살맞아 죽는가하면
짐을 싣고 가던 수레가 삐꺽해서 짐짝이 쏟아질 것 같으면
마땅히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상식인데
법궤를 운반하던 도중에 자격없는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댔다가
현장에서 급살맞아 죽은 성서의 사건 같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아주 인간적인 추측을 해 본다면)
실제로는 심장마비인 것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인가요?
이런 사건이 세계관이 미숙한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질수 있다하더라도
비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데
신앙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이 사업하다가 망하거나
교통사고 나서 죽을 뻔 한 경험들을 자신의 신앙적 결함과 연관해서 해석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구요.

어쨌든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서야 조금씩 눈이 열리는 것 같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결코 육신적인 소경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들어 깨닫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

[레벨:1]정세웅

2006.03.28 15:31:42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들/목사들의 문자적태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시어를 이해한다면, 그 말들을 시어로 - 본인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 표현(간직)하는 마음까지 버리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시인이냐/시어를 이해하느냐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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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3.28 23:24:38

똑소리 님,
재미있게 질문하고, 또 설명하셨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바르트식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라고,
또는 하나님은 전적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역사 전체로 자기를 계시한다는 사실에 대한
실존적인 고백이기도합니다.
우리는 전체를 아직 모릅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네요.
그런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
인간의 인식론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3.28 23:27:07

정세웅 목사님,
우리는 전체 역사로 계시하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동시에 그를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지요.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간접적으로는 가능한 하나님의 경험이 그것입니다.
그걸 영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절대적인 생명, 누미노제, 절대의존감정 등등,
이런 힘에 대한 경험을 수사적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만났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레벨:0]riveroad

2006.03.29 02:54:14

목사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와 관련해서 궁금증을 느끼게 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귀절들을 (한영성경전서(NIV), 한영성경협회)에서 발췌해서 아래에* 옮깁니다. 짧게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주변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직접 만났다"고 하는 분들이 여럿 있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비유하자면 법정에서의 변호사)과는 다른 하나님을 직접 만난 증인(witness *물론,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아님)이다"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겠지요.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는 혼란을 느낍니다.
과연 신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입니다. 아래의 귀절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창세기32:24-30] 밤중이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했다고 주장함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니니라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So Jacob called the place Peniel, saying, "It is because I saw God face to face, and yet my life was spared.")

[출애굽기4:24-26] 모세의 아내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듯한 대목
24: 하나님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At a lodging place on the way, the LORD met Moses and was about to kill him.)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But Zipporah took a flint knife, cut off her son's foreskin and touched Moses' feet with it. "Surely you are a bridegroom of blood to me," she said.)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So the LORD let him alone. (At that time she said "bridegroom of blood," referring to circumc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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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3.30 00:02:07

riveroad 님,
관련성구를 잘 챙기셨군요.
하나님이나 천사 목격담은 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있구요.
사실 성서는 어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일관성을 갖고 저술한 신학책이 아닙니다.
수천년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신앙에 관한 상이한 진술들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서에 없으며,
구원표상도 가지각색입니다.
믿음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고난 자체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결국 성서는 어떤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비교하면 될까요?
성서 텍스트는 모짜르트 악보와 같습니다.
악보가 음악은 아닙니다.
악보는 음악을 지시할 뿐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시할 뿐입니다.
야곱과 모세의 아내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왜 자신들이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명 자체를 만날 수 있을까요?
게놈 지도를 만드는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만나는 걸까요?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현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생명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질문하겠지요.
성서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닙니다.
성서는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에 대한 보도입니다.
하나님은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로 사람과 만나실 수 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간단하게 대답하라고 했는데,
말하다보니, 횡설수설하다보니 길어졌군요.
끝으로,
성서의 텍스트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으로 읽혀야 합니다.
성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서 전체 안에서만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말입니다.

[레벨:0]riveroad

2006.03.30 01:38:26

답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가 많으나, 한편으론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다니는 현실교회는, 이런 주제에 대해 의문을 풀려고 질문을 하거나 또는 의견을 나누고자 토론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없는 불순종하는 자로 몰리거나 대화가 불가능한 험악한 상황으로 변한답니다.
유대인 랍비(Marc Z. Brettler)조차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How to Read the Bibl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October 15, 2005, 384p. )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이 실제로 다윗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까지 하는 때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성서무오류설과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권장됩니다.

바르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것과 교인들과 화합하는 것이 현실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째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주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레벨:15]namoo

2006.03.30 12:18:29

지금의 교회 현실은 조금씩 비슷한 경향이 있는듯 합니다.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럴때 일어나는 질문자체를 아주 불경스럽게 여기는듯한 태도를 자주 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멈춘지도 스무살적부터해서 이십년도 더 된 일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물음에 대한 이야기는 않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준비된 말만 되풀이 하는지.. 도무지 모를일 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이란것도 늘 누군가에의해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선길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것 같습니다.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태양빛이 나를 비추듯이 말이죠.

성서를 '해석'과 '신화적 표현'이란 말 안에서
연애편지를 읽듯 말씀을 보니 좋네요.
마치 처음 편지를 받아들고 봉투를 열어가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것까지 다시 점검해보니 아는게 아니였단것을 알게 되네요.
그리고 용어 하나하나부터 개념을 바로 잡아가는게 필요한걸 느낍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를 모두 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니
알게 모르게 앎과 신앙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거 같구요.

길은 아직 멀지만
길을 나선 이상
그 길 위에 있음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것과 교인들과의 화합' 이거 지금 제게도 당면한 문제 입니다.
제가 좀 더 분명해지면 이런 문제들에서도 더욱 자유로워 질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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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4.18 08:56:03

앎의 길을 나선 이상 화합의 길도 처음부터 다시 나서는게 어떨지요
한발짝 물러나서..........

[레벨:18]눈꽃

2008.10.30 19:23:26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Q,T 따라가다보면 마음속에많은것들이 일어나는데 영 표현력이부족하여서....이런글 올려도 될까? 잠깐제경험 -___--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차안에서 그즈음 나의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어서 참으로 즐거운시간이였었습니다 어떤사항에대하여 열심히궁금해하고나름 노력도하고 기도로 여쭤보기도한일이 있던중 ...그답이 머리속에 떠오르는건지 누가 말해준건도같고...그런데그것이 하나님에관한어떤것인데 그것이 내가 알게된 것이 하나님에대한 아주작은것 예를들자면 여기 코끼리가있다면 그코끼리꼬리에있는 눈에보이지도않을 작은점정도일것같은데....그순간 그깨달음의 희열이얼마나크던지 가던차를급정거하여..... 왜냐하면 이렇게작은 부분을 알게되었는데 더 아니 하나님의 실체를아니 실체까지는아니더라도.... 알게된다면.... 그순간 그느낌....
떠오르는 성서의 한귀절 아 화로다 나는망하게되었구나! 그귀절이 실감이났습니다>>>>> 생략


[레벨:18]은나라

2016.06.29 22:46:05

이사야서의 말씀이 아니 환상이 무얼까? 진짜 환상일까? 알고 싶었는데..여기서 그 실체를 알게 되네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영적인 깊이에서 들여다보고 해석했다는 설명이 옳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유아틱한 질문이 생기는데요.. 그들은 하나님을 공부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경험했다는게 신기 하네요..ㅎ

[레벨:18]은나라

2016.07.01 10:20:16

이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정리가 됩니다.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근거가 정경으로 만들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계시를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하시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소리나 글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구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거심을 어떻게 알아먹느냐..하면,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자기민족이 처한 운명)을..

창조자이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영적인 깊이로 들여다보고 해석한다는 거죠..

이제 이해가 됩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딤후3:16 말씀을..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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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9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은 해가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는 세상을 내다봅니다. 빛이 필요 없는 세상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이 되고, 어린 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 60:19-20절에서 이에 관해서 통찰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

계 21:19

  •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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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5 21: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각각 기록된 열두 기초석도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19절에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벽옥,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비취옥)입니다. 옥수(玉髓)는 낯선 단어인데, 보석의 일종으로 보면 됩니다. 정말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요한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본 것 중에서, 그리고 상상할 수 ...

계 21:24 [2]

  •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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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0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4절의 표현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왕이 각각의 영광 가운데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거룩한 성에 들어간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심판받을 자는 심판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에 던져질 자들은 모두 던져진 이후의 일이니까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자들에게 ‘자기...

계 21:18

  • 2024-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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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4 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8절에 다시 벽옥과 정금(순금)이 나옵니다. 요한이 어디서 이런 건축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을까요? 사람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이 에로스처럼 강합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빛나는 건축물을 향한 욕망 말입니다. 그런 건축물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빛내고, 더 근본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사랑하는 아내나 연인을 위해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건축물을 짓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

계 21:22

  •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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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8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2절에는 아주 특별한 내용이 나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성전 하나쯤 있어야 거룩한 성이 빛나 보일 텐데 말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종교 건물이 없는 곳을 거룩하다고 이름 붙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나 요한이 본 거룩한 성은 그것 자체로 완벽하기에 성전은 없어도 ...

계 22:3 [2]

  • 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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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86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로 묘사하려고 온갖 묵시적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이미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런 생각 없이 반복해서 읽다 보면 하나님을 옥황상제나 임금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좌도 임금이 앉는 최고급 의자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경 문장은 메타포(은유)이...

계 21:17

  •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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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3 21: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성곽은 144 규빗이라고 합니다. 1 규빗이 대략 50cm 정도니까 72m가 되는 셈입니다. 성곽, 즉 성벽의 전체 둘레는 물론 아니고, 높이이거나 두께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앞 구절에서 성체의 높이가 2,304km라고 했으니까 72m 높이의 성벽은 너무 낮아 보입니다. 144규빗은 성벽의 두께라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정도라고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두께입니다. 옛날에는 철근 콘크리트 없이 순전히 기하학적인 기술로...

계 21:20

  •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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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76 21:20 다섯째는 홍바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다섯째부터 열두째까지 당시의 모든 보석이 열거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옥수요, 일곱째는 황보석이요, 여덟째는 녹주석이요, 아홉째는 황옥이요, 열째는 녹옥수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석들이군요. ...

계 19:19

  • 20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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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9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지금 요한은 계속해서 묵시적 환상에 사로잡혀서 글을 쓰는 중입니다. 묵시적 환상이라는 표현이 어떤 이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세계관으로 비칠 겁니다. 하늘 보좌, 무저갱, 용, 짐승, 천사, 천군 등등이 등장하니까요. 비록 신화적인 용어가 사용되기는 하나 묵시적 환상은 아주 분명한 역사 인식이고 세계관입니다. 글쓰기 형식은 신화적이나 내용은 역사적이라는 뜻입...

계 19:21

  • 202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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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41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검에 죽는다거나 모든 새가 나머지 사람들의 살로 배를 불린다고 표현한 19절은 섬뜩한 느낌이 정도입니다. 표현만 그렇지 실제로 그 문장이 가리키는 의미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층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탄 자’의 검에 나머지가 죽는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심판받는다.’라는 뜻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온...

계 19:18

  • 202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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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8 19:18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18절부터 새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끔찍한 명령이 내립니다.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모든 자’는 실제로 모든 사람을 가리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지 불분명합니다. 아마 후자겠지요. 어쨌든지 새들이 사람의 살을 먹는 풍경은 끔찍합니다. 우리가 볼 때 끔찍할 뿐이고 새들에게는 ...

계 19:10

  • 202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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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330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요한은 천사에게 절하고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의 아우라는 우리를 무릎 꿇게 할만합니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산악인의 심정을 상상해보십시오. 에베레스트의 위용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절감합니다. 등정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본격 등정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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