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조회 수 4415 추천 수 99 2006.03.26 23:13:33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제사장입니다. 왕과 제사장이 제도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선지자는 재야에서 이 제도권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왕, 제사장,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에서 이런 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선지자들이 왕정 가까이서 책사 역할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만, 전반적인 흐름에서 볼 때 이런 구분이 가능합니다.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보다 결정적인 요소는 선지자들의 활동 방식에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말’로 먹고 산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왕과 귀족을 향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중을 향해서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말들이 구약성서입니다. 구약성서의 중심을 차지하는 소위 예언서들이 그것입니다. 모세오경과 성문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가 예언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전기 예언서와 선지자들의 설교를 담은 후기 예언서가 모두 선지자들의 말입니다. 모세오경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선지자들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문서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과 성문서의 내용에는 선지자들의 역사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서신학적인 문제들은 제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활동한 선지자들 중에는 우리가 구약에서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름도 없이 활동하다가 사라진 사람들도 꽤나 많습니다. 그들의 말이 역사에 남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요. 그들의 말이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거나 아니면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수준이 높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들의 말을 문서로 남겨줄만한 제자들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또는 괜찮은 글로 남기는 했지만 그걸 기분 나쁘게 생각한 왕에 의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역사는 진행되어 지금 우리에게는 주로 후기 예언서라고 불리는 그런 문서가 주로 선지자들의 예언, 혹은 설교로 남아있습니다.
선지자, 혹은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말과 글을 야훼 하나님의 계시라고 주장했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겠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일들이 많았겠지요. 혹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방식의 말과 글쓰기가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들려준 말씀을 선포한다는 태도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역사를 읽고, 분석하고,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건 곧 해석한다는 말인데,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에는 영감이 필요했습니다. 그 영감은 물론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은 곧 계시이며, 예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들의 말은 다시 역사적으로 비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를 해석한 예언이 다시 역사적으로 비평받는다는 말은 이런 행위가 영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역사해석은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는 수학명제와 다FMS 것입니다. 역사해석은 오히려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해석의 층들이 거의 무한정으로 겹쳐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흉내만 내는 음악가가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흉내만 낸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니 구원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당시에 각광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지자들이 나름으로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중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매끄럽게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은 그때가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입니다. 비록 당시에 극찬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는 역사에 의해서 엄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이 따위야, 하고 핏대를 올릴 수도 있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상숭배 하는 듯한 교회 앞에서 분노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급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사이비 선지자가 없던 때가 어느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혁명의 기운으로 잠시 무언가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혁명이 성공하면 그 혁명의 주체들은 아주 빠르게 무늬만 바뀐 거짓 예언자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status quo>(현실유지)가 우리의 대안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은 결국 역사에 의해서 평가된다는 사실을, 혹은 그런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의 흐름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그런 개혁과 변혁 운동에 역동적으로 참여해야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더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의 예언이, 우리의 설교가, 우리의 역사 해석이 결국 역사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예언도 결정적인 것이 못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역사해석도 역시 잠정적일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지, 혹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진리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곧 진리의 기준이 결코 우리 내부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는 역사를 끌어가는 진리의 영과 일치할 수 있도록 최선으로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를 참된 선지자로 평가하고 그렇게 선택했습니다. 그들의 평가와 선택을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레벨:18]눈꽃

2008.10.30 18:52:36

정목사님! Q,T 따라 가다보니 공부마니 하게되네요 "예를들러서 포퓰리즘..이게뭐꼬 사전찿아보랴 ..궁금증도 마니나니풀리고 ..,시작이겠지만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왜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하는지도....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밖에 다른길이 없습니다! 근데 너무나니 열어놓았다가 엉뚱한것이 들어오면 감당하기힘든사람은 안되는데....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15]

  • 2006-03-20
  • 조회 수 14557

2006년 3월20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막 1:1), 3월20일 [9]

  • 2006-03-20
  • 조회 수 6646

2006년 3월20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술로부터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우리를 여러 가지 면에서 곤란하게 만듭니다. 우선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영으로 존재하는 성서의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재현하는 헬라 신화의 여러 신들처럼 자식을 두었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5]

  • 2006-03-21
  • 조회 수 10607

2006년 3월21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

예수 그리스도 (막 1:1), 3월21일 [4]

  • 2006-03-21
  • 조회 수 5023

2006년 3월21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사본에는 생략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루터는 1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군요.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사본에 따라서 성서의 내용이 아주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들쑥날쑥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현재 발견된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 중에서 동일한 게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 2006-03-22
  • 조회 수 10567

2006년 3월22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1:1), 3월22일 [2]

  • 2006-03-22
  • 조회 수 5137

2006년 3월22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분적으로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열두 살 때의 에피소드가 나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출가한 후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러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소위 공생애가 핵심입니다. 그 기간은 짧게 잡으면 1년여, 길게 잡으면 2년여가 됩니다. 다른 종교창시자나 성인들과 비교할 때 전체 삶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활동...

복음 (1), 3월23일 [7] [2]

  • 2006-03-23
  • 조회 수 28315

2006년 3월23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1>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같은 이름의 교단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복음’을 간판으로 내건 교단도 있습니다. ‘복음교회’가 그 교단입니다. 복음교회는 그렇게 보수적이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진보적이지만도 않은, 비교적 건전한 교단입니다. 복음을 간판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복음교회보다 훨씬 더 복음이라는 단어와 밀착된 교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가 그 교단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회도 나뉘어졌기 때문에 지금 제가 정...

복음 (1), 3월23일 [6]

  • 2006-03-23
  • 조회 수 4876

2006년 3월23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1> 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같은 이름의 교단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복음’을 간판으로 내건 교단도 있습니다. ‘복음교회’가 그 교단입니다. 복음교회는 그렇게 보수적이지만도 않고 그렇다고 진보적이지만도 않은, 비교적 건전한 교단입니다. 복음을 간판으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복음교회보다 훨씬 더 복음이라는 단어와 밀착된 교단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가 그 교단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회도 나뉘어졌기 때문에 지금 제가 정...

복음 (2), 3월24일 [4]

  • 2006-03-24
  • 조회 수 9612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 조회 수 4707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 조회 수 8940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복음 (3) 3월25일 [1]

  • 2006-03-26
  • 조회 수 4363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 조회 수 9617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 2006-03-26
  • 조회 수 4415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2] [1]

  • 2006-03-27
  • 조회 수 9544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 조회 수 4692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4]

  • 2006-03-29
  • 조회 수 9042

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 2006-03-29
  • 조회 수 4237

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 조회 수 8686

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광야 (1), 3월29일 [1]

  • 2006-03-29
  • 조회 수 3856

2006년 3월29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1) 마가가 3절에서 인용한 글은 이사야서 40:3절 말씀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글을 문자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라 약간 손질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마가복음은 이사야의 글을 한 절만 인용했지만 누가복음은 이 뒤로 이어지는 이사야...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