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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월14일 믿음과 구원(1) [3]

  • 2009-01-13
  • 조회 수 1898

||0||02009년 1월12일 믿음과 구원(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 저는 앞에서 바디매오 이야기 묵상을 주로 바디매오의 실존적 입장을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보기를 원하나이다.”였습니다. 이 주제는 어쩌면 본문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건지 모릅니다. 나름으로 신앙적인 깊이를 담아낼 수는 있지만 성서기자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디매오의 실존적 상황을 ...

1월11일 보기를 원하나이다(3) [2]

  • 2009-01-10
  • 조회 수 1693

||0||02009년 1월11일 보기를 원하나이다(3)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0:51) 보기를 원한다는 바디매오의 대답은 물론 보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불편함, 그리고 그런 장애로 당하는 인간적 모멸감, 더 나아가서 그것으로 인한 생존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의 한 표현이겠지요. 이런 욕망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판단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디매오가 어떤 절대적인 힘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빛이 없는 세...

1월10일 보기를 원하나이다(2)

  • 2009-01-09
  • 조회 수 1871

||0||02009년 1월10일 보기를 원하나이다(2)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0:51)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대답하는 바디매오의 심리적 상태가 어떤지 상상해보십시오. 무엇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가 알고 있었을까요? 간혹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중심으로 시각장애인의 어려움을 경험해보겠다고 눈에 안대를 가리고 흰 지팡이를 든 채 거리를 걷는 행사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이벤트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

1월9일 보기를 원하나이다(1) [2]

  • 2009-01-08
  • 조회 수 1914

||0||02009년 1월9일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10:51) 예수님은 맹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무슨 대답이 나올지를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왕적 전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소원을 마음먹은 대로 해결해줄 수 있는 왕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만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이런 발언 형식은 조금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왕이...

1월8일 맹인의 겉옷 [7]

  • 2009-01-07
  • 조회 수 2461

||0||02009년 1월8일 맹인의 겉옷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10:50) 주님이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해들은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에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 문장도 상당히 동(動)적입니다.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나왔다는 세 가지 동사가 이어집니다. 바디매오의 심리 상태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사실에 대한 문학적 기법이 아닐까요? 여기서 겉옷을 내버렸다는 표현은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의 변형구들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본에서 ...

1월7일 주님의 부르심 [4]

  • 2009-01-07
  • 조회 수 1866

||0||02009년 1월7일 주님의 부르심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10:49) “불쌍히 여겨달라.”는 맹인의 외침이 예수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멈추고 그를 불러오게 했고, 제자들은 맹인에게 이 말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너를 부른다.” 위 구절 49절에 “부른다.”는 단어가 세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움직임이 아주 강한 문장입니다. 복음서 기자가 그걸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부르심’이 강조된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1월6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 [8]

  • 2009-01-05
  • 조회 수 2005

||0||02009년 1월6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10:48)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무와 유의 경계선에서 생명을 향해 더욱 크게 고함을 쳐야겠지요.” 이런 문장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너무 관념적으로 전달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뒤에 속한 분들을 위해서 아무래도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우리는 지금 유(有)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우리가 ...

1월5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 [9]

  • 2009-01-05
  • 조회 수 1920

||0||02009년 1월5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10:48)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었다고 합니다. 좀 떠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귀한 선생님이 지나시는데 너무 시끄럽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은밀한 신앙적 대화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 바디매오는 지금 남의 눈치를 볼 처지가 아닙니다...

1월4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 [3]

  • 2009-01-03
  • 조회 수 2246

||0||02009년 1월4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0:47)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에 대한 호칭이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칭은 이 장면에 썩 어울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호칭이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민족 전체를 향한 구원 활동에 연관된 것이지 질병 치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

1월3일 길가에 앉아서 [4]

  • 2009-01-02
  • 조회 수 2112

||0||02009년 1월3일 길가에 앉아서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10:46)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길에 앉아 있고, 예수님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공통점은 길입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제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따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난 갈릴리 ...

1월2일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5]

  • 2009-01-01
  • 조회 수 2414

||0||02009년 1월2일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10:46) 시각 장애인 치유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보도합니다. 그런데 각각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에서 나갈 때 이 장애인을 만난 것으로 말하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은 여리고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것으로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이 장애인의 이름을 거명하는데 반해서 마태와 누가는 그렇지...

2009년 1월1일 여리고에서 [2]

  • 2008-12-31
  • 조회 수 1996

||0||02009년 1월1일 여리고에서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10:46) 신약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위 구절인 10:46절부터 13:37절까지의 본문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보도라고 합니다. 14:1절 이후로는 십자가와 부활이 이어집니다. 결국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수난 설화가 전체 복음서의 삼분의 일 이상을 차지하는 셈입니다. 복음서의 중심이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이겠지요. ...

12월31일 대속자 예수(2) [5]

  • 2008-12-30
  • 조회 수 2024

||0||02008년 12월31일 대속자 예수(2)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어제 저는 예수님이 대속자라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과 똑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라 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이렇게 언급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대속, 또는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분명히 유대...

12월30일 대속자 예수(1)

  • 2008-12-29
  • 조회 수 1965

||0||02008년 12월30일 대속자 예수(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마가복음 기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일방적인 요구로 불거진 제자들 사이의 다툼을 기독론의 관점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왔으며, 더 나아가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입니다. 대속적 죽음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보아...

12월29일 집사(4) [2]

  • 2008-12-29
  • 조회 수 1803

||0||02008년 12월29일 집사(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10:44) 43절과 44절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43절의 디아코노스가 44절에서는 둘로스로 단어만 바뀐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둘로스는 종이라는 뜻의 헬라어인데, 뉘앙스로 보더라도 섬긴다는 의미가 디아코노스보다 훨씬 강합니다. 교회 일꾼인 집사는 곧 종처럼 굴어야 한다는 뜻이겠군요. 바울도 자신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일컬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롬 1:1) 그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 존적이라는...

12월28일 집사(3)

  • 2008-12-27
  • 조회 수 1486

||0||02008년 12월28일 집사(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디아코노스가 식당에서 서빙 하는 사람이라고 앞에서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단지 집사를 비롯한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진술입니다. 그 이유를 찾아봅시다. 교회 안에서는 디아코노스가 주목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멋진 식당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종업원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식당입니다. 그 종...

12월27일 집사(2) [5]

  • 2008-12-26
  • 조회 수 2424

||0||02008년 12월27일 집사(2)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한국교회의 직제 중에서 서리 집사와 안수 집사가 있습니다. 같은 집사인데도 서리 집사는 일 년 마다 재임명을 받아야 하며, 안수 집사는 특별한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년이 보장됩니다. 안수 집사를 항존직이라고 부릅니다. 안수 집사 제도가 교회에 정착한 자세한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서리 집사로는 아까운 인물이지만 장로로 세우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12월26일 집사(1) [5]

  • 2008-12-25
  • 조회 수 2152

||0||02008년 12월26일 집사(1)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위 구절 후반절의 ‘섬기는 자’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의 번역입니다. 여기서 집사(執事)라는 뜻의 영어 단어 deacon이 나왔습니다. 집사는 어떤 교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식탁에서 남을 돕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위 구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우선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를 주목하십시오. 바로 앞절 42절은 고관들의 권세 부리기에 대...

12월25일 권세 부리기

  • 2008-12-24
  • 조회 수 1591

||0||02008년 12월25일 권세 부리기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10:42)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문제로 화를 내는 제자들을 불러다가 세상 고관들이 보이는 권세의 속성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권세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이런 메커니즘에 묶인 사람들에게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권세가 그런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 되고 맙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권세 지향성이 매우 강합니다. 이런 성향은...

12월24일 제자들의 화 [4]

  • 2008-12-23
  • 조회 수 1864

||0||02008년 12월24일 제자들의 화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10:41) 야고보와 요한의 행태를 보고 제자들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럴 만도 합니다. 하나는 열 두 제자가 똑같이 고생한 마당에 그들 형제들만 특별대우를 받겠다고 나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상황이 제자들의 자리를 배려해줄만한 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 행은 십자가형의 길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열 명의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냈다는 건 아무래도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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