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9일 자리(4)

조회 수 1804 추천 수 2 2008.12.18 23:03:09
||0||02008년 12월19일 자리(4)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신자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본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라도 교회 일에 몰입합니다. 그것으로 기쁨을 얻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오히려 불편할 때가 많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허할 겁니다. 그래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악순환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여기서 무거운 짐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쉼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쉼, 즉 안식입니다.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가만히 있는 게 최선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 일은 곧 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것입니다.

위의 설명이 관념적으로 들리시나요?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야 한다는 여러 성서구절이 기억나시나요? 이 짧은 묵상에서 이런 문제를 길게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를 칭의론으로 정리해야겠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가리킵니다. 첫째, 인간은 의로운 행위를 행할 수 없습니다. 둘째, 믿음은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입니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바울의 진술도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바라보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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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08.12.18 23:24:55

'믿음이란 존재의 용기이다'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 존재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받아들인다는 뜻인가요?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신 안의 어둠을 인정하는 것... 그 어둠을 밝혀 줄 빛을 기대하는 것...
이 믿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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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18 23:59:59

여기서 말하는 '존재'는요,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특징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있음' 자체를 가리킨답니다.
노장 식으로 말하면 '도'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과 행위가 아니라
밍음의 관계로만 집중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게 사람들에게는 불안한 거지요.
뭔가를 해야만 자기만족이 생기거든요.
이런 불안을 넘어서려면 참된 용기가 필요하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용기에요.
대림절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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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12.19 00:33:20

목사님 말씀대로 가만히 있는 신앙생활 많이 해보았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아무 봉사나 훈련도 받질 않고 요리 조리 빠져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요 가만히 교회만 다니는 것이 결코 성경적이지도 않는것 같구요..
저 또한 이런 교회생활로 얻은것 보다는 잃은것이 더, 아니 너무나도 많은것 같습니다.
저의 신앙이 점점 미지근해지고 입으로만 하나님을 아는것 같고
내 안에는 그분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거하지 아니하는것 같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할 능력이 우리에겐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스스로 일 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와 함께 동역하기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과 함께 일하신것 아닌가요?
쉽게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모세의 팔이 올라갈때에만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팔이 내려가면 곧바로 아말렉에게 지는 상황이 되었죠.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고향 마을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어서
다만 소수의 병인만 고치셨다고 하였더군요.
또한 예수님도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많은 희생과,결단을 요구 하셨더군요.
또한 주님을 위해 열심을 다할 동역자를 친히 택하시고 가르치시고 하셨구요
저는 구약의 메세지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결코 가만히 있으라는 그런 가르침은
아닐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교회 여러 부서에서 사역하고, 각 부서에서 섬기며 봉사하는 교인에게 하나님은 은혜도
풍성히 주시지 않으실까요?
그것이 결코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시는 은혜도 분명 많을텐데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자녀된 관계로서의 우리의 신앙생활의 도리가
노장의 있음 자체의 '도' 와 과연 같이 갈수 있는 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시간에도 주님과 같이 일할 동역자를 찾고 계실텐데요..
목사님의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에 왠지 저도 우울한 마음에 한마디 올려 봤습니다.





[레벨:3]광야

2008.12.19 09:25:36

정목사님,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자가
대개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옳고 사랑이 있고,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편에서 보면 더러운 자기의가 숨어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와 진정으로
사랑을 더하고, 의를 더하고, 용기를 더하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도를 향한
존재의 용기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삶이 전적으로 가능할 수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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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8.12.19 09:32:58

목사님의 어제 답글에서 말씀하신
교회의 종교적 과소비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모든 면에서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져
목사님의 이 묵상에 수차례 돌다리 두드리듯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에 대한 염려나 불안으로부터 자유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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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19 11:02:04

별달 님,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과도하지만 않다면
교회 일에 참여하는 건 필요하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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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19 11:04:19

광야 님,
공부도 참고 하다보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듯이
주님을 위한 일도 힘들더라도 하다보면
성령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답니다.
두 가지만 전제하면요.
1. 과도하지 말 것.
2. 주님을 위한 봉사는 반드시 교회일만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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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2.19 11:05:06

앗, 헨리 나우엔의 경구를 알고 있군요.
바로 그거에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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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8.12.21 11:36:51

아인슈타인의 성공의 법칙
S=X+Y+Z
S= 성공
X= 말을 많이 하지 말것
Y= 생활을 즐길 것
Z= 한가한 시간을 가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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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1일 여리고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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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대속자 예수(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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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0일 대속자 예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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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30일 대속자 예수(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마가복음 기자는 야고보와 요한의 일방적인 요구로 불거진 제자들 사이의 다툼을 기독론의 관점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왔으며, 더 나아가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말입니다. 대속적 죽음은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켜 직접 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보아...

12월29일 집사(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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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9일 집사(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10:44) 43절과 44절은 똑같은 내용입니다. 43절의 디아코노스가 44절에서는 둘로스로 단어만 바뀐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둘로스는 종이라는 뜻의 헬라어인데, 뉘앙스로 보더라도 섬긴다는 의미가 디아코노스보다 훨씬 강합니다. 교회 일꾼인 집사는 곧 종처럼 굴어야 한다는 뜻이겠군요. 바울도 자신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일컬은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롬 1:1) 그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 존적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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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8일 집사(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디아코노스가 식당에서 서빙 하는 사람이라고 앞에서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단지 집사를 비롯한 교회의 직분에 대해서 종교적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진술입니다. 그 이유를 찾아봅시다. 교회 안에서는 디아코노스가 주목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멋진 식당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종업원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 식당입니다. 그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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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7일 집사(2)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10:43) 한국교회의 직제 중에서 서리 집사와 안수 집사가 있습니다. 같은 집사인데도 서리 집사는 일 년 마다 재임명을 받아야 하며, 안수 집사는 특별한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년이 보장됩니다. 안수 집사를 항존직이라고 부릅니다. 안수 집사 제도가 교회에 정착한 자세한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서리 집사로는 아까운 인물이지만 장로로 세우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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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권세 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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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제자들의 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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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3일 성탄의 신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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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3일 성탄의 신비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는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10:40) 예수님은 야고보에게 좌우편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고 이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능력이 있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건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읽으면 권한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자리가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또는 그 자리는 그것에 적합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예수님...

12월22일 제자들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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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1일 잔과 세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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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1일 잔과 세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묻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사태가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이 질문에는 예수님의 수난이 담겨 있습니다. 잔과 세례는 그 수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빠 아...

12월20일 인식의 한계

  • 2008-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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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20일 인식의 한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우편과 좌편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른 채 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신앙적인 열정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곧 신앙적 앎, 신앙적 이해를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이해는 매우 중요합...

12월19일 자리(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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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19일 자리(4)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신자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본인들이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어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라도 교회 일에 몰입합니다. 그것으로 기쁨을 얻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오히려 불편할 때가 많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허할 겁니다. 그래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악순환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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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18일 자리(3)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어제 저는 신자들이 교회의 과도한 일에 지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열정이 강해서 일을 많이 하겠다는 거야 제삼자가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영성을 훼손하는 길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구원의 기쁨으로 충성 봉사하는 게 왜 영성의 훼손이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그건 착각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길들여진 겁니다. 영성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은, 그 맛을 아는 사람은 가능...

12월17일 자리(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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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17일 자리(2)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자신의 영적 훈련을 위해서 ‘자리’를 남에게 넘겨주자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그래서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신앙훈련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나름으로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체면이 선다고 말입니다. 그런 탓인지 장로가 되기 위한 이전투구도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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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16일 자리(1)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야고보와 요한이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하나는 주의 우편에, 다른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들 형제가 중요한 자리를 다 차지하면 나머지 제자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요. 뒤에서 다른 제자들이 이들의 말을 듣고 화를 냈다고 하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는 거 같습니다. 문제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자리에 예민한 이유는 그 자리가 그 사람의 위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

12월15일 무엇을 원하는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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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2월15일 무엇을 원하는가?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10:36)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는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시기적으로 문제가 될 뿐 아니라 그 태도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해 달라니, 정말 철딱서니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걸 강청기도라고 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비유나 주변에서 벌어진 이야기 중에도 막무가내로 자기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 이야기와 강아지 취급을 받았지만 밥상 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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