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4일 기도의 능력(2)

조회 수 2443 추천 수 11 2008.08.23 23:27:16
2008년 8월24일 기도의 능력(2)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한국교회가 기도 만능론에 빠졌다는 사실은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기도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새벽에 드리는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는 논리도 있고, 릴레이식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생각도 있고, 안수 기도와 안찰 기도도 있으며, 철야기도회, 수능수험생을 위한 기도회 등등, 이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전문적인 기도 꾼으로 행세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기도는 많이 드릴수록 좋은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기독교인이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좋다거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의 본질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고 그것이 오용, 남용되는 것을 지적하는 중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 만능론으로 집약될 수 있다는 뜻이구요.

기도 만능론이 일으키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도 만능론이 결국 하나님의 초월성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투사(self-projection)의 대상으로 제한시킵니다.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해결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에 기계적으로 응답해야 할 분인 것처럼 다루어집니다. 결국 기도 만능론은 하나님의 자유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유’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초월해서 행위 하십니다. 마치 아이가 울지만 예방 주사를 놓아야 할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 너머에서 그분의 고유한 섭리로 통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보기에 기도 만능론은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고, 인간의 욕망을 무절제하게 확대시킬 위험성이 높습니다.  

[레벨:1]머릿돌

2008.08.24 14:09:28

하나님의 자유 그리고 의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역사와 우주의 운행
하나님에 대하여 깊게 공부하고 생각해야만 될 이유가 여기에 있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에 무관심한 경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기도를 강조하면서 말이죠.
촛불집회를 가지 말고 기도해라. 나라걱정하지 말고 기도해라. 등등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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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4 23:19:39

머릿돌 님,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군요.
하나님의 섭리 신앙이 자칫 역사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회 참여는 반드시 신앙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틴 루터 식으로 말해서
우리는 천국 시민이면서 동시에 지상 시민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참여한 역사와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책임을 져야겠지요.
이 두 세계가 구별은 되나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
일종의 역설적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아야겠지요.
이런 긴장에서 바른 선택을 하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신학적으로 깊이 인식해야 하고,
이 세상을 사회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겠지요.
이것의 결합을 영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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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1일 첫째와 꼴찌(3)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가능한 대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괜찮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결국 복음 전파도 효율적으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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