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6일 기도의 능력(4)

조회 수 2625 추천 수 10 2008.08.25 23:06:38
2008년 8월26일 기도의 능력(4)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주님은 바리새인과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외식의 기도,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바리새인의 외식과 이방인의 중언부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문제를 생각할 때도 역시 중요한 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도 역시 바른 기도가 될 수 없겠지요. 잘못된 기도는 바로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기도에서 확인했듯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남에게 보이는 기도나 중언부언 하는 기도나 모두 사람이 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와 직접 연관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예민한 법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 전에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알아봐야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나 정보만 알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존재론적 깊이를 아십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기도드리는 우리가 어떤 태도이어야 하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하나님, 한 말씀만 하옵소서. 이 종이 듣겠나이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닐는지요.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지키시는지 설렘으로 기다리는 게 바로 기도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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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8.26 01:14:38

너무 부정적인 면만 보는 걸 수도 있지만
교회서 믿음 좋고 기도 많이 한다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더 편협적이고 경직되고
상대방을 한수 아래로 생각하고
가르치려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런것들이 결국
하나님께 보단 자기에게 집중한 모습이 아닐까요

다비아를 알고
가장 많이 바뀐 것이 있다면
아마 '기도'일 겁니다
자꾸 말 수가 줄어 드네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용납'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냥 나를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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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6 23:24:53

시와그림 님이
요즘 가장 진도가 잘 나가는 제자군요.
하나님 앞에서 말이 줄어든다는 건
신앙적으로 철리 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가능한대로
신앙의 선배들이 드렸던 기도를 따라하게 되지요.
기도문을 읽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려면
힘을 많이 빼야하는데요,
그렇게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좋은 밤.

[레벨:1]머릿돌

2008.08.28 14:14:03

조금씩 신학공부를 하면서 가장 많이 줄게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신학이 인문학이어서 오히려 믿음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하던데요.
저는 하나님께 무언가 달라고 하기보다는 무엇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가 더 찾게 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성서를 많이 읽게 되었는데요. 특히 복음서를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때는 어떤 분위기였을까?
내가 그 때 있었다면 어땠을까? 예수님이 지금 이시대에 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등등
구약을 보면서는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을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그것이 지금 나와 어떤 관계인가? 분열된 이스라엘과 지금 한국교회와 어떤 연관이 있나? 등등

또 믿음의 선배님들이 공부하신 자취를 많이 보게 됩니다.
안셀무스의 Credo ut intelligam은 무슨 뜻인가?
도미니크는 알비십자군의 잔혹함을 보고 수도회를 만들었는데 그로 인하여 Albertus Magnus와 Thomas Aquinas가 나오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가? 종교개혁과는 어떤 관계인가?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등등

배울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다비아를 통하여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조직신학의 참고문헌도 몇권 사서 보고 있습니다.
많이 어렵더군요.
판덴베르그의 사도신경해설을 보면서 신앙고백이란 교리의 결정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면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금 감당하는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도 하구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8 17:09:03

머릿돌 님은 어디서 신학공부를 하세요?
독학이에요, 아니면 과정을 밟나요?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게 바로 신학공부겠지요.
오늘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많은 젊은이들이
2천년 역사로 들어가는 수고는 제쳐놓고
지금 자기의 신앙적 열정에 포로가 되어 있더군요.
이것도 어찌보면 나르시시즘의 한 현장이지요.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해설만 잘 읽어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요.
신학의 즐거움을 계속 맛보십시오.

[레벨:1]차가운열정

2008.09.04 21:48:42

목사님, 또 댓글 올릴 수 밖에 없는 진한 감동이 밀려 드네요. 기도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님이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비록 목사님의 수준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공감하구요. 전 아직도 기도가 무엇일까? 고민하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기도는 삶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때까지 순간순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생각하는 것이 저의 기도 생활(?)의 전부이거든요. 그러니 기성 교인들에게는 제가 젼혀 기도하지 않는 자로 보이겠지요. 저의 기도에 관한 생각에 목사님의 고견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이 글의 말미에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어떻게 지키시는지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이 기도일거라는 목사님의 가르침에 또한 한수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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