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9일 기도의 능력(7)

조회 수 2203 추천 수 7 2008.08.28 23:13:55
2008년 8월29일 기도의 능력(7)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대한 앞서의 묵상에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더 혼란스러워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간질병을 고친 기도의 능력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던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이 완전히 몸에 각인된 분들에게는 저의 설명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런 신앙의 패턴을 바꿔야한다고 말씀드려도 별로 소용이 없겠지요.
조금 옆으로 나가는 말이지만, 사람의 생각은 한번 고정되면 바뀌지 않습니다. 근본적이고 문자적인 성서관에 물들어 버리면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부정하면 자기의 모든 존재 근거가 허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비아의 말씀 묵상에서 어느 정도 새로운 깨우침이 열리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이미 그럴 가능성을 갖고 있는 분들일 겁니다. 문자주의적 성서관에 대해서 평소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분들만 저의 설명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인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기도 문제를 두 가지로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기도는 자기의 꿈을 이루는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불치병을 기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불치병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하는 게 핵심이겠지요.
둘째, 다른 주제도 그렇지만 기도라는 주제도 한 성서 구절로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 전체와 연관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이런 해석학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겠지요.

profile

[레벨:8]시와그림

2008.08.29 08:31:51

문제는 '분리'에 있겠지요
'믿음'이나 '기도''나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 믿음을 하나님으로 부터, 그 기도를 하나님으로 부터
자꾸만 분리 시키고 객체화 시킵니다
그리고 '이간자'는 역시 그놈의 집요한 '자아'이구요 !

심오한 신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죄됨'의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판넨베르크 <믿음의 기쁨>을 읽으며
절실히 공감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아멘.


profile

[레벨:5]uncle

2008.08.29 09:49:20

지금까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이제
조금씩 눈을 떠 나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9 10:14:28

앞으로 한국교회에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이들이
중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바로 서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요.
그들이 사회적으로 부족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모두에게 좋은 하루.

[레벨:16]리옹~

2008.08.29 11:29:27

기도의능력에 대한 큐티...관심을 가지고 읽어보았습니다.
100% 동감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레벨:3]물찬 제비

2008.08.29 15:05:48

친구의 소개로 몇일 전부터 이 곳에 들어옵니다. 오래(?) 믿어 왔던 나의 신앙에 대해 많은 반성과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많은 어리석음....곧 죄.....
목사님...감사합니다....

[레벨:0]불청객

2008.08.29 21:29:13

(약4:2,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겔 36:36, 37)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 기도만능주의는 사라져야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고 물론, 기도무용론을 주장하시는 것은 아니시구요,
그럼 이제 기도하는 일만 남았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9 23:42:38

리옹 님, 오랜 만이군요.
잘 지내지요?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9 23:43:53

물찬제비 님,
닉네임이 재미있군요.
생각이 날렵하다는 건지요.
혹은 몸매가 그런가 보군요.
앞으로 다비아에서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0월3일 종교적 똘레랑스 [3]

  • 2008-10-02
  • 조회 수 1965

2008년 10월3일 종교적 똘레랑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어제 묵상의 마무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기운을 잃고 말 어린 싹과 같았습니다. 유대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자체도 완전히 일치된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예수에 대한 신앙 한 가지만 확실했을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불확실했습니다. 누가 ...

10월2일 초기 기독교의 고민 [3]

  • 2008-10-01
  • 조회 수 1988

2008년 10월2일 초기 기독교의 고민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막 9:39) 요한의 견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제자 집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즉시 주를 비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가 애매모호하게, 또는 너무 실용적으로 들립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최소한 명분이라도 있었을 겁니다. 비록 제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

10월1일 패거리 의식 [4]

  • 2008-10-01
  • 조회 수 1971

2008년 10월1일 패거리 의식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막 9:38-41절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사건을 놓고 제자들과 예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예수를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 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인칭 사용이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9월30일 예수 영접(7) [7]

  • 2008-09-29
  • 조회 수 2173

2008년 9월30일 예수 영접(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영수 영접’ 항목을 정리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2001년 10월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박사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대우학술재단(이사장 김용준)이 실시하는 세계 석학초청 세미나 건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맞춰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Theologie und Philosophie)을 번역했습니다. 6개월 동안 하루 ...

9월29일 예수 영접(6) [8]

  • 2008-09-28
  • 조회 수 1902

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9월28일 예수 영접(5) [4]

  • 2008-09-27
  • 조회 수 2136

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9월27일 예수 영접(4) [3]

  • 2008-09-26
  • 조회 수 2029

2008년 9월27일 예수 영접(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틈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본질에서는 일치이지만, 위격(persona)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9월26일 예수 영접(3) [8]

  • 2008-09-25
  • 조회 수 1822

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9월25일 예수 영접(2) [5]

  • 2008-09-24
  • 조회 수 1978

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

9월24일 예수 영접(1) [2]

  • 2008-09-23
  • 조회 수 2051

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3]

  • 2008-09-22
  • 조회 수 1854

2008년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6) 샘터교회에 어린아이가 세 명이 있습니다. 세 살에서 여섯 살짜리로 여자 아이 둘에, 남자 아이 하나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럽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는, 자기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이 부십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 난 것도 모른 채 직관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그게 아름답단 말입...

9월22일 첫째와 꼴찌(4) [3]

  • 2008-09-21
  • 조회 수 1721

2008년 9월22일 첫째와 꼴찌(4)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공통점은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에게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에 속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테니스장에 가면 사람들이 저와 게임을 하기 원합니다. 인...

9월21일 첫째와 꼴찌(3) [4]

  • 2008-09-20
  • 조회 수 1874

2008년 9월21일 첫째와 꼴찌(3)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가능한 대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괜찮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결국 복음 전파도 효율적으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9월20일 첫째와 꼴찌(2) [2]

  • 2008-09-20
  • 조회 수 1555

2008년 9월20일 첫째와 꼴찌(2)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

9월19일 첫째와 꼴찌(1) [1]

  • 2008-09-18
  • 조회 수 1847

2008년 9월19일 첫째와 꼴찌(1)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무슨 일로 그렇게 시끄러웠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가 크냐 하고 논란을 벌이던 제자들에게 가슴 뜨끔한 쓴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구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

9월18일 누가 크냐?(6) [1]

  • 2008-09-17
  • 조회 수 1421

2008년 9월18일 누가 크냐?(6)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4) 교회가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로 없는 공동체로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인 안전장치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민주적 질서를 구축하는 게 최선입니다.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선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큰 틀에서는 민주적 질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에서는 훨씬 복잡하겠지요. 기본 개념만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운영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현실...

9월17일 누가 크냐?(5) [1]

  • 2008-09-16
  • 조회 수 1597

2008년 9월17일 누가 크냐?(5)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은 교회 직책의 카리스마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들이 신학이론일 뿐이지 실제의 교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분명히 질적으로도 높고 낮은 자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목사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등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선교회와 청년회는 당회의 치리를 받아야 합니다. 조금 더 심한 경...

9월16일 누가 크냐?(4) [1]

  • 2008-09-15
  • 조회 수 1536

2008년 9월16일 누가 크냐?(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 끝 대목에서 목사와 장로 직 대해서 한 마디 씩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은사론에 해당됩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교회 구조 안에 있는 모든 직책은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카리스마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신자들에게는 각각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도 있지만, 주일학교 ...

9월15일 누가 크냐?(3) [1]

  • 2008-09-14
  • 조회 수 1895

2008년 9월15일 누가 크냐?(3)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가 공동체에서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분분했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인간에게서 남보다 커야겠다는 욕망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개인의 의식보다는 제도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의식과 제도가 함께 가야겠지만, 더 우선적인 부분은 제도입니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어떤 직책에 대한 욕망에 빠...

9월14일 누가 크냐?(2) [4]

  • 2008-09-13
  • 조회 수 2161

2008년 9월14일 누가 크냐?(2)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인간의 속성이나, 인간이 모인 사회의 매카니즘은 기본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명제에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역시 그런 논란에 휩싸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테니까요. 오늘 한국교회는 “누가 크냐?” 하...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