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 기도의 능력(9)

조회 수 2240 추천 수 14 2008.08.30 23:46:23
2008년 8월31일 기도의 능력(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판넨베르크가 서른두 살의 젊은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1960년 5월9일에 부퍼탈 신학교 아침 기도회에서 ‘기도’(시 143:1-12)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발췌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 요청은 하나님의 신실성, 즉 그가 이전에 행하신 구원 행위에 대한 신실성을 기억하게 한다는 바로 그 의미입니다.
둘째,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시편 기자의 요청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대답을 전혀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다르게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답변하십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어둡습니다. 대답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분명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신탁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게서 기다립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며, 그 성령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영은 우리를 자신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레벨:22]머리를 비우고

2008.08.31 21:56:50

판넨베르크 설교를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32살의 비교적 젊은 시절에 이런 설교가 나온다는 것도 놀랍지만
짧은 문장에 이런 깊이의 내용을 담아둘 수 있다는게 참 놀랍습니다.

1. 자기 의지의 소원성취가 아닌 자기 의지를 거두어 들이는 것
2. 침묵을 경험하는 것
3. 우리 앞에 놓인 어둠을 경험하는 것

결국... 하나님 앞에 힘을 빼라는 것이군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아래의 설명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기도할 때 할말이 점점 사라지지만...
참 편안해 지고 풍성해 집니다.
내일 아침 기도가 더욱 기대됩니다.
좋은 일주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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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31 23:23:08

머리를 님,
판넨베르크는 신학의 대가에요.
그림과 철학에서도 대가가 있듯이
신학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판넨베르크의 글을 많이 읽어보세요.
자신도 모르게 영성이 깊어지는 걸 경험하게 될 겁니다.
감사.

[레벨:4]알고파

2008.09.01 16:50:51

어둠을 경험하라는 것이 더 감명 깊이 와 닿는 것은 왜 일까요?
칼라너는 하나님을 '거룩한 신비'로 표현하더군요..
어둠 저편에서 우리에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우리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분..
우리가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게 파악되는 것이 맞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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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1 21:11:21

알고파 님은 신학자가 다 되셨군요.
하나님을 어둠으로 경험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신학자이며, 영성가이고, 신비주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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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0일 지옥(2)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벌레와 불이라는 지옥 표상에 대한 어제의 신학적 묵상이 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보다는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런 접근은 별로 신학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근본적으로 그런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련된 성구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다른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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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3일 종교적 똘레랑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어제 묵상의 마무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기운을 잃고 말 어린 싹과 같았습니다. 유대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자체도 완전히 일치된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예수에 대한 신앙 한 가지만 확실했을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불확실했습니다. 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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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패거리 의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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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일 패거리 의식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막 9:38-41절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사건을 놓고 제자들과 예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예수를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 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인칭 사용이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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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30일 예수 영접(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영수 영접’ 항목을 정리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2001년 10월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박사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대우학술재단(이사장 김용준)이 실시하는 세계 석학초청 세미나 건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맞춰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Theologie und Philosophie)을 번역했습니다. 6개월 동안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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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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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9월27일 예수 영접(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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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7일 예수 영접(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틈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본질에서는 일치이지만, 위격(persona)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9월26일 예수 영접(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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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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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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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3]

  • 2008-09-22
  • 조회 수 1872

2008년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6) 샘터교회에 어린아이가 세 명이 있습니다. 세 살에서 여섯 살짜리로 여자 아이 둘에, 남자 아이 하나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럽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는, 자기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이 부십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 난 것도 모른 채 직관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그게 아름답단 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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