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조회 수 2120 추천 수 7 2008.09.06 23:11:31
2008년 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에게 일어날 그런 일들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을 텐데요.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고까지 합니다.(막 8:32) 이런 일련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거나 통찰력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 메시아라거나 그의 운명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인식 사이의 단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인간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예수의 운명과 연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는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그 당시의 상식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처형은 저주받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그것을 넘어섰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질문하기도 두려워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직면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이 자기 손바닥 안에 놓인 것처럼 넘치는 자신감으로 그것을 선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한 사이비 설교자들의 선동이 아닐는지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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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비가오는날

2008.09.07 17:36:32

그것을 넘어섰습니다.......그것을 넘어섰습니다
넘어 오시는 하나님.

[레벨:4]알고파

2008.09.07 19:40:17

전에 폴틸리히의 설교집의 설교 중에서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나 '우리 존재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너무나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처럼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인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이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가지지 않음 속에서
오직 "기다림"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다는..
소망과 믿음에서 훨씬 자유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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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7 22:47:48

무슨 말인지,
마치 선문답 같이 들려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설명을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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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7 22:50:42

알고파 님은
신학적인 훈련이 되신 분이라서
실용성에 떨어진 한국교회 현실에서
교회 고르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무난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겠지요.
기다림은 바로 종말론적 신앙이지요.
좋은 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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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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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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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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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1일 첫째와 꼴찌(3)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가능한 대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괜찮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결국 복음 전파도 효율적으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9월20일 첫째와 꼴찌(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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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0일 첫째와 꼴찌(2)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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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9일 첫째와 꼴찌(1)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무슨 일로 그렇게 시끄러웠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가 크냐 하고 논란을 벌이던 제자들에게 가슴 뜨끔한 쓴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구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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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8일 누가 크냐?(6)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4) 교회가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로 없는 공동체로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인 안전장치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민주적 질서를 구축하는 게 최선입니다.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선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큰 틀에서는 민주적 질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에서는 훨씬 복잡하겠지요. 기본 개념만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운영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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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7일 누가 크냐?(5)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은 교회 직책의 카리스마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들이 신학이론일 뿐이지 실제의 교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분명히 질적으로도 높고 낮은 자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목사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등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선교회와 청년회는 당회의 치리를 받아야 합니다. 조금 더 심한 경...

9월16일 누가 크냐?(4) [1]

  • 2008-09-15
  • 조회 수 1536

2008년 9월16일 누가 크냐?(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 끝 대목에서 목사와 장로 직 대해서 한 마디 씩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은사론에 해당됩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교회 구조 안에 있는 모든 직책은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카리스마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신자들에게는 각각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도 있지만, 주일학교 ...

9월15일 누가 크냐?(3) [1]

  • 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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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5일 누가 크냐?(3)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가 공동체에서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분분했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인간에게서 남보다 커야겠다는 욕망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개인의 의식보다는 제도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의식과 제도가 함께 가야겠지만, 더 우선적인 부분은 제도입니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어떤 직책에 대한 욕망에 빠...

9월14일 누가 크냐?(2) [4]

  • 2008-09-13
  • 조회 수 2161

2008년 9월14일 누가 크냐?(2)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인간의 속성이나, 인간이 모인 사회의 매카니즘은 기본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명제에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역시 그런 논란에 휩싸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테니까요. 오늘 한국교회는 “누가 크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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