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조회 수 1781 추천 수 10 2008.09.08 22:38:20
2008년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거룩한 두려움, 또는 영적 두려움이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몰라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그것을 어떤 한 가지 형태로 설명하거나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마나 하나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의 만남에서 경험되는 두려움을 실증적으로 묘사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큰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절대타자에 대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타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가리킵니다. 물 안과 물 밖을 생각해보십시오. 물 안의 물고기들은 물 밖의 인간을 절대타자로 경험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사유능력이 없는 물고기들이 인간을 경험할 일은 없겠지요. 낚시에 걸린다거나 그물에 걸리면 그 주인인 인간을 경험하긴 하겠지만 인식하지는 못하겠지요. 어쨌든지 그 물고기에게는 인간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절대타자(totaliter aliter)이니까요. 전혀 다르니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철부지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놀면서 아버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건 정말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입니다. 한번 낯선 게 아니라 늘 낯선 존재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그리고 완성하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섭니다. 하나님과 세상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때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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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08 23:50:40

정목사님께서 글이나 기도에 잘 사용치 않으시는 단어 중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인 듯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친근하고 익숙한 단어가
인격적인 의미를 넘어 '의인화'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제게 아버지 처럼 내편이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상을 갖고 있던 제 경험에 비추어....)
신이란 "부모에게서 느끼는 유아기적 소망의 투사" 란 얄미운 프로이드적 표현 앞에
조금씩, 반박할 실마리를 찾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예전에 못느꼈던 낯설음이 있지만
'한번 낯선게 아니라 늘 낯선 존재'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습니다


[레벨:5]희락당

2008.09.09 02:51:13

이번 묵상을 읽고 나니까 갑자기 문학 용어 한 가지가 떠오르네요. "미메시스"
물론 이 말의 뜻은 "모방(Imitation)"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낯설게 하기"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문학 작품은 우리 인간이 대하는 모든 사물 또는 실체에 대해서 "낯설게 하기"에 성공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 경험이 "낯선 경험"이냐에 따라서 그 무엇인가가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미메시스와 신앙의 관계를 조금 파헤쳐 보는 것도 괜찮은 작업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4]알고파

2008.09.09 12:10:48

시와그림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마치 이름에 붙어 있는 성(姓)처럼
그리스도교에서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단어로 생각됩니다.
절대타자이자 창조주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어마 어마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너무 진부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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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09 21:05:29

오늘 새벽예배에서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절대타자"이신 하나님 생각을 했답니다. ㅎㅎ
창조자이시고 통치자 되시는 주님께서 성육신 하심에 대한 생각으로..
방관자로써가 아니고 무지몽매한 인생들을 도우시는 사랑의 주님으로..

저는 좋은 하루 시작합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으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생각의 폭을 넓혀 주심에.. 좋은 밤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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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9 23:55:11

대글을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군요.
그분들이 저의 독자이면서 제자이고,
동시에 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밤을 맞으소서.
우주 역사에서 단 한번 뿐인 이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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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패거리 의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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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일 패거리 의식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막 9:38-41절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사건을 놓고 제자들과 예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예수를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 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인칭 사용이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9월30일 예수 영접(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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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30일 예수 영접(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영수 영접’ 항목을 정리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2001년 10월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박사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대우학술재단(이사장 김용준)이 실시하는 세계 석학초청 세미나 건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맞춰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Theologie und Philosophie)을 번역했습니다. 6개월 동안 하루 ...

9월29일 예수 영접(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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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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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9월27일 예수 영접(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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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7일 예수 영접(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틈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본질에서는 일치이지만, 위격(persona)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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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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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

9월24일 예수 영접(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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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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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6) 샘터교회에 어린아이가 세 명이 있습니다. 세 살에서 여섯 살짜리로 여자 아이 둘에, 남자 아이 하나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럽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는, 자기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이 부십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 난 것도 모른 채 직관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그게 아름답단 말입...

9월22일 첫째와 꼴찌(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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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2일 첫째와 꼴찌(4)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공통점은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에게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에 속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테니스장에 가면 사람들이 저와 게임을 하기 원합니다. 인...

9월21일 첫째와 꼴찌(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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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1874

2008년 9월21일 첫째와 꼴찌(3)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가능한 대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괜찮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결국 복음 전파도 효율적으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9월20일 첫째와 꼴찌(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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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0일 첫째와 꼴찌(2)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

9월19일 첫째와 꼴찌(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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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1846

2008년 9월19일 첫째와 꼴찌(1)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무슨 일로 그렇게 시끄러웠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가 크냐 하고 논란을 벌이던 제자들에게 가슴 뜨끔한 쓴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구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

9월18일 누가 크냐?(6) [1]

  •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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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8일 누가 크냐?(6)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4) 교회가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로 없는 공동체로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인 안전장치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민주적 질서를 구축하는 게 최선입니다.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선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큰 틀에서는 민주적 질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에서는 훨씬 복잡하겠지요. 기본 개념만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운영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현실...

9월17일 누가 크냐?(5) [1]

  • 200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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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7일 누가 크냐?(5)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은 교회 직책의 카리스마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들이 신학이론일 뿐이지 실제의 교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분명히 질적으로도 높고 낮은 자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목사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등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선교회와 청년회는 당회의 치리를 받아야 합니다. 조금 더 심한 경...

9월16일 누가 크냐?(4) [1]

  • 2008-09-15
  • 조회 수 1535

2008년 9월16일 누가 크냐?(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 끝 대목에서 목사와 장로 직 대해서 한 마디 씩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은사론에 해당됩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교회 구조 안에 있는 모든 직책은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카리스마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신자들에게는 각각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도 있지만, 주일학교 ...

9월15일 누가 크냐?(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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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1892

2008년 9월15일 누가 크냐?(3)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가 공동체에서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분분했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인간에게서 남보다 커야겠다는 욕망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개인의 의식보다는 제도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의식과 제도가 함께 가야겠지만, 더 우선적인 부분은 제도입니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어떤 직책에 대한 욕망에 빠...

9월14일 누가 크냐?(2) [4]

  • 2008-09-13
  • 조회 수 2160

2008년 9월14일 누가 크냐?(2)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인간의 속성이나, 인간이 모인 사회의 매카니즘은 기본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명제에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역시 그런 논란에 휩싸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테니까요. 오늘 한국교회는 “누가 크냐?” 하...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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