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조회 수 1799 추천 수 10 2008.09.08 22:38:20
2008년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거룩한 두려움, 또는 영적 두려움이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몰라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그것을 어떤 한 가지 형태로 설명하거나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마나 하나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의 만남에서 경험되는 두려움을 실증적으로 묘사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큰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절대타자에 대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타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가리킵니다. 물 안과 물 밖을 생각해보십시오. 물 안의 물고기들은 물 밖의 인간을 절대타자로 경험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사유능력이 없는 물고기들이 인간을 경험할 일은 없겠지요. 낚시에 걸린다거나 그물에 걸리면 그 주인인 인간을 경험하긴 하겠지만 인식하지는 못하겠지요. 어쨌든지 그 물고기에게는 인간이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절대타자(totaliter aliter)이니까요. 전혀 다르니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철부지 아이가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놀면서 아버지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건 정말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낯선 분입니다. 한번 낯선 게 아니라 늘 낯선 존재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그리고 완성하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섭니다. 하나님과 세상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때 우리는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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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08 23:50:40

정목사님께서 글이나 기도에 잘 사용치 않으시는 단어 중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인 듯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친근하고 익숙한 단어가
인격적인 의미를 넘어 '의인화'의 지경에 이르는 것을 경계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제게 아버지 처럼 내편이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하나님 상을 갖고 있던 제 경험에 비추어....)
신이란 "부모에게서 느끼는 유아기적 소망의 투사" 란 얄미운 프로이드적 표현 앞에
조금씩, 반박할 실마리를 찾는 듯 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예전에 못느꼈던 낯설음이 있지만
'한번 낯선게 아니라 늘 낯선 존재'라는 말씀에 용기를 얻습니다


[레벨:5]희락당

2008.09.09 02:51:13

이번 묵상을 읽고 나니까 갑자기 문학 용어 한 가지가 떠오르네요. "미메시스"
물론 이 말의 뜻은 "모방(Imitation)"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낯설게 하기"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문학 작품은 우리 인간이 대하는 모든 사물 또는 실체에 대해서 "낯설게 하기"에 성공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그 경험이 "낯선 경험"이냐에 따라서 그 무엇인가가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미메시스와 신앙의 관계를 조금 파헤쳐 보는 것도 괜찮은 작업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4]알고파

2008.09.09 12:10:48

시와그림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마치 이름에 붙어 있는 성(姓)처럼
그리스도교에서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단어로 생각됩니다.
절대타자이자 창조주인 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어마 어마한 사실이..
우리에게는 너무 진부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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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09 21:05:29

오늘 새벽예배에서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절대타자"이신 하나님 생각을 했답니다. ㅎㅎ
창조자이시고 통치자 되시는 주님께서 성육신 하심에 대한 생각으로..
방관자로써가 아니고 무지몽매한 인생들을 도우시는 사랑의 주님으로..

저는 좋은 하루 시작합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으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생각의 폭을 넓혀 주심에.. 좋은 밤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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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09 23:55:11

대글을 주시는 분들 덕분으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군요.
그분들이 저의 독자이면서 제자이고,
동시에 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행복한 밤을 맞으소서.
우주 역사에서 단 한번 뿐인 이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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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2일 지옥(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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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2일 지옥(4)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쓰겠습니다. “그것을(인간의 지옥행) 단정적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성서의 세계와 기독교 신앙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지옥을 부인하는군, 하고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겠지요.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지옥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입니다.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창조와 은총의 하나님께서 그 많은 영혼들을 영원히 구더...

10월11일 지옥(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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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1일 지옥(3)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지옥은 ‘게헨나’의 번역입니다. 신약에 12번 언급된 이 게헨나는 골짜기를 뜻하는 ‘게’와 사람 이름인 ‘힌놈’이 합성된 단어인데, 이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으로 멀리 않은 비탈의 한 계곡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구약의 보도는 느헤미야 11:30, 여호수아 15:8, 왕하 23:6,16 등에 나옵니다. 고대에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불에 태워 몰록신에게 바치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고, 예루살렘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

10월10일 지옥(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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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0일 지옥(2)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벌레와 불이라는 지옥 표상에 대한 어제의 신학적 묵상이 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보다는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런 접근은 별로 신학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근본적으로 그런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련된 성구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다른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다른 사실’을 ...

10월9일 지옥(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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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9일 지옥(1)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손을 찍어버리라는 43절, 발을 찍어버리라는 45절, 그리고 눈을 빼버리라는 47절은 지옥(게헨나)에 떨어질 운명을 영생과 대립적인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제 48절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가 한 번 더 등장합니다.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지 않는 구더기를 상상해보십시오. 그것들과 붙어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인간의 파멸을 가리킵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곳인가 하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형상...

10월8일 눈의 범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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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8일 눈의 범죄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7) 손의 범죄나 발의 범죄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눈의 범죄도 역시 죄를 범한 인격의 구체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손이나 발에 비해서 눈은 유혹에 훨씬 민감하다는 점에서 훨씬 유별나 보입니다. 죄와 연관해서 손이나 발은 수동적인 반해서 눈은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가 3장에 인류 최초의 범죄 행위가 등장합니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습니다. 뱀은 에...

10월7일 발의 범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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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7일 발의 범죄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5) “발의 범죄”라는 표현은 사실 성립이 안 됩니다. 발은 뇌로부터 명령을 받아서 움직인 것뿐이니까요. 범죄의 장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뇌라고 해야겠지요. 뇌도 주범이 아니라 종범이겠군요. 뇌는 생리적인 작용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니까요. 그렇다면 범죄의 장본인은 인격이라고 하는 게 옳을 건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거론된 발은 인격을 상징적으로 표현...

10월6일 손의 범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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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6일 손의 범죄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 42절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범죄라고 한다면 이제 43절부터 세 번에 걸쳐서 동일한 형식으로 진술되는 어구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 실족하는 범죄입니다. 그런데 그 묘사가 너무 선정적이어서 당혹스러울 지경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손에는 손, 이에는 이라는 하므라비 ...

10월5일 실족케 하는 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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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5 실족케 하는 죄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쳐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위의 구절이 포함된 막 9:42-50절은 시험에 걸리지 말라는 주제로 집약될 수 있는 어구 모음입니다. 44절과 46절은 사본에 따라서 없기도 하고 48절과 같은 어구로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사본에 따라서 차이가 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떤 텍스트도 완전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녹화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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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4 기독론적 뿌리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 9:41) 본문 41절은 문맥의 흐름에 비쳐볼 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38-40절은 큰 능력을 행하지만 제자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자들과 예수의 대립적인 입장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1절은 느닷없이 물 한 그릇과 상에 대한 이야기로 돌변했습니다. 물론 이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시킬 수는 있습니다. 제자 집단에 속하지 않은...

10월3일 종교적 똘레랑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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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3일 종교적 똘레랑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40) 어제 묵상의 마무리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기운을 잃고 말 어린 싹과 같았습니다. 유대교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자체도 완전히 일치된 조직으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예수에 대한 신앙 한 가지만 확실했을 뿐이지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불확실했습니다. 누가 ...

10월2일 초기 기독교의 고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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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2일 초기 기독교의 고민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막 9:39) 요한의 견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제자 집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즉시 주를 비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가 애매모호하게, 또는 너무 실용적으로 들립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최소한 명분이라도 있었을 겁니다. 비록 제자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

10월1일 패거리 의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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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1일 패거리 의식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막 9:38-41절은 따라가기가 쉽지 않는 내용입니다. 예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사건을 놓고 제자들과 예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예수를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축귀 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자체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인칭 사용이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9월30일 예수 영접(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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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30일 예수 영접(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영수 영접’ 항목을 정리하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드려도 될는지요. 2001년 10월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박사가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대우학술재단(이사장 김용준)이 실시하는 세계 석학초청 세미나 건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맞춰서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Theologie und Philosophie)을 번역했습니다. 6개월 동안 하루 ...

9월29일 예수 영접(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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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9월28일 예수 영접(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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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9월27일 예수 영접(4) [3]

  • 200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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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7일 예수 영접(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틈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본질에서는 일치이지만, 위격(persona)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9월26일 예수 영접(3) [8]

  • 2008-09-25
  • 조회 수 1839

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9월25일 예수 영접(2) [5]

  • 2008-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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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

9월24일 예수 영접(1) [2]

  • 2008-09-23
  • 조회 수 2076

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3]

  • 2008-09-22
  • 조회 수 1869

2008년 9월23일 어린아이를 안으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 9:36) 샘터교회에 어린아이가 세 명이 있습니다. 세 살에서 여섯 살짜리로 여자 아이 둘에, 남자 아이 하나입니다. 저는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럽다는 표현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군요. 아무 것도 거리낌이 없는, 자기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이 부십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잘 난 것도 모른 채 직관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그게 아름답단 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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