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5일 예수 영접(2)

조회 수 2002 추천 수 5 2008.09.24 23:12:00
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나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는 못할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는 건 이 세상살이의 경험에서 오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영적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보낸 사람과 보냄을 받은 사람이 똑같은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 어떤 선생심이 학생에게 심부름을 시켰다고 합시다. 선생이나 학생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합니다. 그는 역사 초월적이지만 예수님은 역사 의존적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예수를 보낸 하나님이 예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어떤 존재로 생각하시나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보이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가시적이고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님을 보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그게 실제로 가능한가요?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그런 종류의 사건을 말하는 걸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하나님 경험입니다. 거기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과 예수를 하나로 인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음의 세계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레벨:4]알고파

2008.09.25 09:08:17

목사님, 잘은 모르지만 '의식그리스도론'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아닌가요?
솔직한 제 심정은 이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시다는 고백으로 발전해야 할 것 같은데..
하긴 너무 이상적인 전개인것 같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에 무슨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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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5 16:27:04

'의식 그리스도론'이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인식으로부터
그리스도론을 시작하자는 것인가보군요.
그것도 그리스도론의 한 관점이기는 하겠지만
딱 그 지점에서만 출발하기는 힘들겠지요.
시간이라는 게 좀 묘해서
예수님이 기원전 3년이라는 분명한 시간에서 몸을 입으시고
빌라도 총독이 다스리던 그 시대, 그 지역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지만
동시에 그는 선재적 존재이기도 하거든요.
일단 '의식 그리스도론'이라는 개념을 내가 정확하게 모른 채 이런 말을 계속할 수는 없겠네요.
그 용어의 원천이 어딘지 궁금하네요.

[레벨:4]알고파

2008.09.26 12:28:43

죄송합니다. 저도 어디서 읽었는지..잘 모르는 단어를 써서..
그냥 목사님은 왠지(?) 다 아실것 같아서..
제가 기억하기로는 예수께서 하나님과
그 어떤 피조물이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의지의 일치를
보이셨다는 것이 예수를 그리스도가 (인정?)되게 하신다..
이것을 의식그리스도론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쉴라이엘마허가 처음 주장했다고 하던가..
폴 틸리히나 칼라너 책에서 읽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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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08.09.27 22:09:55

인식의 전환이 없다면 이런 말씀의 묵상은 전혀 들어오지 않겠군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속에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공동체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과 믿었다는 사실 정말 놀랍군요.
말씀이 추상적이고 않고 손에 잡힏듯이 보여 지네요.
예수의 하나님의 경험처럼,
오늘날 우리 각자도 하나님의 대한 경험속에서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갔으면 하네요..
성서는 놀라운 세계를 담고 있는 보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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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7 23:57:33

위의 글이 추상적이지 않고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구요?
영혼이 열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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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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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8일 예수 영접(5)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위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영접은 예수 영접이고, 예수 영접은 하나님 영접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거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직선의 도표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중심은 물론 예수 영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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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7일 예수 영접(4)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틈이라는 말은 그렇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의 일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 뿐입니다. 본질에서는 일치이지만, 위격(persona)으로는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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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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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5일 예수 영접(2)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낸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보낸 이는 누군가요? 우리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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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4일 예수 영접(1)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크냐 하는 논쟁에 빠져든 제자들을 향한 충고가 이제 예수 영접과 하나님 영접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막 9:33-37절의 단락에서 중심 주제는 무엇일까요? 낮춤의 영성인가요, 아니면 예수 영접인가요? 또는 이 양자의 일치인가요? 병행구인 마 18:1-5절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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