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예수 영접(6)

조회 수 1918 추천 수 6 2008.09.28 23:27:55
2008년 9월29일 예수 영접(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예수 영접의 출발은 감정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삶이 허무다가거나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휩싸여서 예수를 만납니다. 우울증이나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졌던 사람들에게도 그런 기회가 많습니다. 심지어 가정 문제나 사업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예수를 영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영접이 일종의 도피처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마십시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의 밑바닥에 들어갔다가 다시 벗어나는 경험이 예수 영접과 연결되어 있어서 예수 영접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영접은 그런 강렬한 경험만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성숙과 심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앙 성숙의 과정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차원입니다.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런 공부는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뚫어볼 수 있는 이성에 의해서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학적 영성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도의 신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공부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쪽으로 영혼의 무게를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의 영이 말을 걸고, 또한 그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세상의 삶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삶에서도 성숙이 없으면 퇴행하기 마련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어떤 퇴행이 나타나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본인들은 그것을 퇴행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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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29 03:07:54

조금 전에 딸아이 방에 들어 갔더니
애가 울고 있더군요 이유를 물어 보니
'사는게 막막하고 죽는게 두렵다'라고 하더군요
얼마 전에 내가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던 것이
나름 충격 이었나 봅니다
여태껏 본인이 기대어 왔던 하나님과 너무 달라서
이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나요
그래서 많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시화가 느끼는 두려움은 성숙한 신앙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오히려 그 불안이 너를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으로 인도 할 거라고...
목사님!
딸 아이의 모습에서
영낙없는 '나'를 봅니다
진리의 영이 다비아를 통해 말을 거심과
허락하신 신앙의 과정에 따른 생각의 파고들을
감사하고 또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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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9 09:02:10

시화가 정신적으로 조숙하군요.
그 막막함과 두려움의 경험이 처음이라면
정말 견디기 힘들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자꾸 피하게 되지요.
그렇게 피하는 방식으로는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기는 어려워요.
정면으로 돌파해야되겠지요.
그걸 시화가 감당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옆에서 어머니가 잘 도와주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대화를 많이 하세요.
모녀 간에 그런 문제,
죽음, 삶, 하나님, 존재, 시간, 허무, 불안, 두려움 등등에 대해서
대화할 수 있따면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겠지요.
그게 쉽지는 않아요.
아이들이 그런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지요.
그건 정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험이에요.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그 문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맛보는 거지요.
사족으로 한 마디,
시화의 그 막막함과 두려움이
혹시 공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는 잘 살펴보세요.
만에 하나, 그것이라면 좀 문제거든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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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slowneasy

2008.09.29 12:27:52

영화 밀양에서도 전도연씨가 바닥상황에서 교회를 찾아 펑펑 울며 은혜받는? 장면이 나오지요... 하지만 영화 후반부의 행태를 보면... 이청준씨도 이런 감정적 경험만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아니 시작도 안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중학생인 제 아들도 신앙에 대한 질문을 가끔 해 오는데... 깊이있는 대답을 못 해주는 제가 늘 문제입니다... 저도 이제 겨우 오래된 틀을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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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29 23:33:13

청소년들을 위한 성서공부, 신학교재가 필요하겠군요.
기성교인들도 신학을 모르는데
청소년이 웬말이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가능하고, 꼭 그래야만 합니다.
청소녀들이 철학 공부를 해야하듯이
교회 청소년들이 신학공부를 해야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거겠지요.
하여튼 그런 주제로 아드님과 말문을 틀 수 있도록 하시지요.

[레벨:4]danha

2008.09.30 08:15:45

구원을 완료된 사건으로 받아들였을때는
마음에 안도감을 가장한,정확히 말해서 삶에 무게를 도피한 상태였는데,
물론 구원을 소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니
교회에 대한 봉사 헌신이 거의 당연한 의무로 받아 들여졌었죠.
제가 요즘 예수님의 십자가위에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처럼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봐도 저의 세계관이나 생명관이 넓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을 완료된 사건으로 받아들일땐 자기집중에 더 잘빠지는것 같습니다.
구원이 종말에 가서야 수건을 벗은것처럼 확실히 알수 있다는 진리에
모든 촉각을 하나님께서주신 생명 ,세상, 예수의 부활등의 관계를 이해하려는데 세웁니다.

[레벨:6]디딤

2008.09.30 09:05:13

청소년들을 위한 신학교재가 없습니다.
좋은 교재가 있으면 추천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집필하시는 편이 더 빠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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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30 09:28:16

단하 님,
짧은글에 단하 님의 새로운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군요.
다비아 때문에 새로워졌다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단초가 주어져 있었는데,
다비아가 조금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봅니다.
단하 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다비아 사이트 운동이 존재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군요.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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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30 09:29:17

시간이 허락되면 청소년을 위한 기초신학을 집필해보겠어요.
내 딸들에게 설명한다는 기분으로 하면 되겠지요.
약속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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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6일 예수 영접(3)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저는 어제 “보냄을 받았다.”는 진술의 신학적 의미를 조금 살폈습니다. 이런 묵상의 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변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걸 감수하면서도 그런 설명을 한 이유는 이런 기회에서 우리가 성서와 교리의 현실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 훈련이 없으면 성서와 교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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