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8일 “귀신아!”(6)

조회 수 2086 추천 수 8 2008.08.17 23:26:47
2008년 8월18일 “귀신아!”(6)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 9:25)

복음서 기자들이 왜 귀신을 거론했는지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악한 힘의 존재론적 깊이라 할 귀신을 제어하는 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귀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문제들에 연루된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만나려면 이미 확정된 교리가 아니라 교리 이전의 역사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교리와 교리 이전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아는 게 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다시 오늘 우리의 삶에 체화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별할 줄 모르거나,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저의 설명이 멀게만 느껴질 겁니다. 오늘의 주제와 연관해서 교리 이전의 역사로 잠시 들어가 보실까요?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복음서에 간혹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나중에 형성된 것들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하고 있었다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도망갔을 리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예수님의 생전에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이 이후로 예수님을 전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로 말입니다. 그것도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 게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긴 과정에 귀신 제어라는 사건이 새롭게 기독교 전승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인식에서 형성된 전승입니다.

profile

[레벨:8]시와그림

2008.08.18 10:56:39

정답을 찾았다고
확신하거나 우기지 않으며
모든 논의를 열어두고
답을 찾는 길위에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올 봄 목사님과 처음 대화했던 자리서
사단을 인간이 갖고 있는 심층적 악한 힘으로
설명 하셨을때
경직되었던 것들이 풀리고
어떤 사고의 '운동력'을 느낄수있었습니다

저희딸 시화가
목사님 큐티 제목을 보더니
'납량특집' 큐티래요 ~
납량특집 시리즈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18 16:14:14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까요?
귀신도 진화한답니다. ㅎㅎ
2천년전의 귀신은 소박헸는데,
지금은 아주 영악하지요.
그래서 귀신인지 아닌지 잘 분간이 안 가는 거에요.
자본주의가 귀신 아닐까요?
profile

[레벨:28]정성훈

2008.08.18 16:57:14

신자본주의는 너무나 영악한 귀신입니다..
문제는 신자들과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속고 있어요.

어떤 분이 성령과 악령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했나요?!
이제는 종이 한장 차이도 아니고 습자지 정도 되겠군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늘깨어 있어라"

[레벨:22]머리를 비우고

2008.08.19 10:44:35

납량특집 큐티.... ㅎㅎㅎ
사람들이 영악해 지고 내면을 감추는 다양한 기술들이 나왔는데...
귀신도 바쁘겠지요...
자본주의.... 도 귀신이라... 60-70년대 같았으면 바로 조사 받으셨을 발언이죠...ㅋㅋ
시대가 좋아진 만큼 귀신들도 고급스러워 졌겠지요.
그 고급스러워진 귀신 아래 파생된 조무래기들이 교회와 이 나라에 퍼진..
성장주의와 숫자 우상숭배가 아닐지요...
올림픽 등수 놀이에 온 국민이 놀아 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도 매주 부흥은 교인 수 증가, 재정 증가 등을 의미하고
개척하고 몇 년 만이 교인이 얼마 되었다 카더라!~ 식의 이야기가 간증이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샌다고 외국 나가서도 마찬가지죠... 참... 부끄럽습니다.
장로 대통령은 여기에 기름을 부으려하고요...

[레벨:1]머릿돌

2008.08.19 12:12:56

교리이전의 역사란 말에 머리가 확 깨는 느낌입니다.
교리가 정립된 이후 오랜 세월동안 암기되고 강요되며 제대로 교육되지 않은 믿음이 21세기 귀신의 농간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저번에 정용섭목사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우리나라는 민간신앙과 기독교신앙이 이상하게 잘 조화되어 있는 느낌도 받습니다. 어떻게 이를 바로 잡을까? 답을 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문제를 자각했으니 열심히 나를 가로막는 껍데기를 깨어야겠습니다.
하긴 예수님에 계실 동안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죠.
알았으면 십자가에 도망가겠습니까?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것이 인간인데 인류구속역사의 위대한 순간에 도망가는 짓을 했겠습니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1 09:44:33

머릿돌 님,
머리가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면
신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느낌이 앞으로 계속해서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런 과정이거든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앞에서
우리는 기존의 모든 것들이 확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신앙이 삶의 환희로 녹아드는 오늘 하루!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9월22일 첫째와 꼴찌(4) [3]

  • 2008-09-21
  • 조회 수 1741

2008년 9월22일 첫째와 꼴찌(4)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의 공통점은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사람에게 기대할 게 많은 사람들에 속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테니스장에 가면 사람들이 저와 게임을 하기 원합니다. 인...

9월21일 첫째와 꼴찌(3) [4]

  • 2008-09-20
  • 조회 수 1904

2008년 9월21일 첫째와 꼴찌(3)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꼴찌가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실제로 그렇다기보다는 가능한 대로 잘난 체 하지 말고 남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살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좀 괜찮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그래야 결국 복음 전파도 효율적으로 일어나지 않겠느냐 하고 말입니다. ...

9월20일 첫째와 꼴찌(2) [2]

  • 2008-09-20
  • 조회 수 1574

2008년 9월20일 첫째와 꼴찌(2)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자기를 낮추...

9월19일 첫째와 꼴찌(1) [1]

  • 2008-09-18
  • 조회 수 1864

2008년 9월19일 첫째와 꼴찌(1)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막 9:35) 무슨 일로 그렇게 시끄러웠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가 크냐 하고 논란을 벌이던 제자들에게 가슴 뜨끔한 쓴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구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

9월18일 누가 크냐?(6) [1]

  • 2008-09-17
  • 조회 수 1444

2008년 9월18일 누가 크냐?(6)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4) 교회가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로 없는 공동체로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적인 안전장치는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민주적 질서를 구축하는 게 최선입니다.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선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큰 틀에서는 민주적 질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의 적용에서는 훨씬 복잡하겠지요. 기본 개념만 두 가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운영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현실...

9월17일 누가 크냐?(5) [1]

  • 2008-09-16
  • 조회 수 1611

2008년 9월17일 누가 크냐?(5)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은 교회 직책의 카리스마론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들이 신학이론일 뿐이지 실제의 교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는 분명히 질적으로도 높고 낮은 자리가 고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목사가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권찰 등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선교회와 청년회는 당회의 치리를 받아야 합니다. 조금 더 심한 경...

9월16일 누가 크냐?(4) [1]

  • 2008-09-15
  • 조회 수 1553

2008년 9월16일 누가 크냐?(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어제의 묵상 끝 대목에서 목사와 장로 직 대해서 한 마디 씩 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은사론에 해당됩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교회 구조 안에 있는 모든 직책은 카리스마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카리스마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신자들에게는 각각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목사의 카리스마도 있지만, 주일학교 ...

9월15일 누가 크냐?(3) [1]

  • 2008-09-14
  • 조회 수 1922

2008년 9월15일 누가 크냐?(3)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가 공동체에서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분분했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인간에게서 남보다 커야겠다는 욕망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개인의 의식보다는 제도의 개혁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의식과 제도가 함께 가야겠지만, 더 우선적인 부분은 제도입니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어떤 직책에 대한 욕망에 빠...

9월14일 누가 크냐?(2) [4]

  • 2008-09-13
  • 조회 수 2177

2008년 9월14일 누가 크냐?(2)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인간의 속성이나, 인간이 모인 사회의 매카니즘은 기본적으로 “누가 크냐?” 하는 명제에 묶여 있으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생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역시 그런 논란에 휩싸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집단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을 테니까요. 오늘 한국교회는 “누가 크냐?” 하...

9월13일 누가 크냐?(1) [3]

  • 2008-09-13
  • 조회 수 2015

2008년 9월13일 누가 크냐?(1)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가버나움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토론한 게 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 받고 죽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전해들은 가운데서도 “누가 크냐?” 하는 말싸움을 벌였으니까요.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는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좀 부끄럽지 않았겠어요? 철딱서니 없다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

9월12일 가버나움에서 [4]

  • 2008-09-12
  • 조회 수 2366

2008년 9월12일 가버나움에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 9:33)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을 제외하면 가버나움이 가장 자주 나오는 마을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심문당한 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서 잘 알려진 것뿐이지 예수님이 실제로 활동한 기간만으로 한다면 가버나움이 훨씬 더 비중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사신 적도 있습니다.(마 4:13) 제2의 고향이라 할 만합니다. 예수님...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9]

  • 2008-09-10
  • 조회 수 1892

2008년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야겠지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니까요. 이게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일단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부활은 종말론적으로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입...

9월10일 제자들의 두려움(4)

  • 2008-09-09
  • 조회 수 1487

2008년 9월10일 제자들의 두려움(4)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을 낯설게 경험하는 거라는 어제의 묵상에 대해서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존재와 세상과 하나님은 낯설게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고 익숙하게 경험되는 분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예수님에게 기도드리고, 매일 큐티를 통해서 그분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떤 부흥사는 길을 걸을 때 한쪽 손을 비워두...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5] [1]

  • 2008-09-08
  • 조회 수 1800

2008년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거룩한 두려움, 또는 영적 두려움이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몰라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그것을 어떤 한 가지 형태로 설명하거나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마나 하나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의 만남에서 경험되는 두려움을 실증적...

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11]

  • 2008-09-07
  • 조회 수 1816

2008년 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 가장 전형적인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산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집트 파라오의 병거와 마병들을 홍해에서 궤멸시킬 것을 본 이스라엘도 야훼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4]

  • 2008-09-06
  • 조회 수 2136

2008년 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에게 일어날 그런 일들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을 텐데요.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고까지 합니다.(막 8:32) 이런 일련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

9월6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3) [4]

  • 2008-09-05
  • 조회 수 1947

2008년 9월6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3)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1)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직’ 완전히 실증적인 차원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 두 사이의 긴장에는 타종교 문제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되...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3]

  • 2008-09-04
  • 조회 수 1911

2008년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인 위로와 불안이 무슨 뜻인지 보충해야겠습니다. ‘위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서만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위로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참...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2]

  • 2008-09-03
  • 조회 수 2176

2008년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갈릴리를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유를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때문이라고 보도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메시아 비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비밀이 유지되려면 가능한 대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채...

9월3일 은밀한 거동 [5]

  • 2008-09-02
  • 조회 수 2100

2008년 9월3일 은밀한 거동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막 9:30)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거론된 세 가지 중요한 사건, 즉 “주는 그리스도시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에게 일어난 변형 사건, 그리고 간질병 아이 치유가 일어난 곳은 갈릴리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갈릴리를 통과해서 사마리아를 거...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